천냥 빚 같이 갚아요
사고가 언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음이 거칠고 불안한 사람은 이를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로 욕설이 잔뜩 섞인 강한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마음이 유약해 거절이 두려운 사람은 상대를 배려하는 언어를 사용하느라 언어에 자신의 의사는 숨겨버리고 만다.
사고가 언어에 영향을 주는 것만큼이나 언어가 사고에 주는 영향도 지대하다. 언어와 사고는 늘 상호작용하기에 언어 또한 사고를 바꾼다. 내가 뱉은 말에 따라 그 상황 속에서 나의 생각도 쉽게 바뀔 수 있다. 물건을 들고 가다 와르르 떨어트렸을 때, “하, 시간도 없는데 왜... 짜증 난다.”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속마음이 비록 그러할지라도 언어를 바꾸면 생각도 바뀐다. “주우면 되지! 액땜했다!” 짜증이 올라오기 전에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의 말로 재빨리 화를 막는 것이다. 가끔은 신나는 뮤지컬 톤으로 해준다. 다~ 흘렸네~ 어쩌겠니~ 흘린 것을~ 지금 줍자~
매 학년이 시작될 때 아이들에게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화가 나기 전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해버리면 아무 일도 아니게 된다고. 아이들의 눈은 의심으로 가득하다. 아마 학년 첫날이니 나와 낯을 가리는 중이라 의심의 눈초리만 보내지만, 시간이 지나 나와 라포가 쌓여있다면 아이들은 크게 말할 거다. 에이! 선생님 저는 그래도 똑같이 짜증 날 것 같은데요! 그럼 나는 대답할 것이다. 해보고 말해, 요노무 귀염둥이들아.
그리고 나는 아이들과 꼭 약속을 한다. 우리 반 어린이들의 마음 건강을 위해 지양해야 할 단어와 애용해야 할 단어를 말해준다. 우리 학급의 금기어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쓰지 마 1 <망했어> : 미술이나 실과 시간 등 산출물이 나오는 수업에서 아이들이 많이 쓰는 어휘다. 특히 고학년 학생들은 주변 친구들을 많이 의식하기 때문에 다른 친구와 내 작품의 완성도 차이를 확연히 느끼는 순간 망했다는 단어로 애써 버무리려 한다. 즉, 진짜 망했다는 생각보다 약간의 회피성 단어라 볼 수 있겠다. 원래는 말이야... 내가 이것보단 잘할 능력이 있는데... 오늘만 망해버리고 만 것이야... 같은 느낌. 담임이 다가가서 살펴보면 전혀 망하지도 않았고, 다시 하면 되거나 충분히 복구 가능한 정도다. 약간의 미스에 전부 다 망해버렸다고 하면 그때부터 계속하고자 하는 의지가 꺾인다. 그래서 나는 망했다는 말은 전면 금지시킨다. 대신 다른 말(약간 삐끗했다!)로 대체하게끔 한다. 이 대체어를 처음 말할 때에는 아이들끼리 키득키득 웃는다. 자유분방한 사춘기 어린이들에게는 약간 오글거리는 말인가 보다. 하지만 효과는 실로 대단하다. 주어진 2시간 동안 낙오자 없이 아이들을 끝까지 달리게 할 수 있다.
쓰지 마 2 <아니 근데> : 아이들이 모두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고 갈등을 능숙히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것은 담임의 소망이기도 하지만, 고학년 어린이에게 대인관계는 거의 인생의 전부이기에 친구와의 평화를 가장 절실히 바라는 이는 담임이 아닌 아이들일 것이다. 대인관계를 잘 맺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 대화에서 상대와 잘 티키타카 할 수 있는 비법. 상대방이 나로 하여금 거부당한다고 느끼게 만들지 않는 것. 이를 위해 ’아니‘와 ’근데‘ 이 두 단어를 덜 사용해 보자고 제안한다. 내 말을 듣고 상대가 말을 시작할 때 ’아니...‘라고 시작하면 내 생각을 반박하려는 느낌이 든다. ’근데...‘라는 시작도 마찬가지다. 비록 상대의 생각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그런 언어를 듣는 순간 사고가 움직인다. 부정적인 말의 시작이 나를 반박하고 거부한다는 생각이 들면 대화가 유쾌하지 않다. 이를 ‘그래?’ ‘진짜?’로 바꾸면 서로를 수용하는 대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쓰지 마 3 <사실은> : 사람이 신뢰를 얻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왜 양치기 소년 이야기가 할머니부터 갓난아기까지 전설처럼 내려오겠는가. ‘사실...’ 혹은 ‘사실은...’이 입에 붙으면 그 말 앞에 했던 다른 말들은 거짓처럼 느껴진다.
쓰지 마 4 <인 것 같아> : 아이들은 자신의 의견을 확실하게 말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혹시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과 일치하지 않거나 자신의 대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고가 에둘러 언어로 표현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것 같아, 좋은 것 같아, 별로인 것 같아, 미안한 것 같아, 속상한 것 같아... 이런 말들처럼. 너에게 맛있고 좋으면, 혹은 별로라면 ’~인 것 같아 ‘라는 말 대신 확실하게 이야기하자고 해준다. ‘맛있다, 좋다, 별로다’라고 명확히 말할 때 자신의 취향이 고스란히 적립된다. 또 내 생각을 정확하게 말할 때 스스로의 태도가 당당해진다. 미안하고 속상한 감정이 든다면 그때도 확실히 이야기하도록 지도한다. 애매하게 말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표현할 때 문제를 인지할 수 있고 상대도 나의 마음을 알아준다.
쓰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애용하자고 적극 장려하는 말들도 있다.
팍팍 써 1 <고마워> :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 상대의 호의가 사실 별로 고맙지 않더라도 고맙다는 말을 내뱉은 순간 삶이 나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 같은 풍요로운 마음이 든다. 상대와의 관계도 플러스될 수 있으니 효과 만점.
팍팍 써 2 <미안해> : 때때로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것을 패배의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과는 패배 선언이 아님을, 사과해야 할 때 사과 잘하는 사람이 바른 사회적 능력을 가진 멋진 사람임을 정확하게 인지시킨다.
팍팍 써 3 <사랑해> : 사랑한다는 말이 능숙하게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어려워서 몸을 배배 꼬는 사람이 있다. 애정표현은 아껴서 저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정이 두둑하게 흘러넘치려고 할 때 얼른 상대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너무 귀여워, 왜 이렇게 예뻐, 우리 강아지들, 나... 너 사랑하냐. 드라마 대사가 아니라 내가 애들에게 하는 말이다(선생님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설문조사에서 ‘귀여워’가 당당히 1위를 차지). 어려서 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기가 차더라도 ‘너 왜 이렇게 귀여운겨?’ 해버리면 화가 안 난다. 업무에 지쳐 다크가 턱끝까지 내려와 있어도 ‘너네 너무 사랑해서 출근하는 거야‘ 말하면 아이들도 담임이 넉다운되지 않도록 적극 협조해 준다. 다소 영혼 없는 애정표현이더라도 교실에 사랑한다는 말이 난무하면 고스란히 사고로 전이된다. 정말 우리는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다.
언어의 힘이라는 게 참 대단하다. 말 한마디가 작은 세상 정도는 쉽게 바꿀 수 있다. 나의 세상도, 어린이의 세상도.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았으면 좋겠다. 꼭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