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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나 : 숲의 수호자들 (27편)

흩어진 불꽃들

by 아르망

흩어지는 불꽃들


도토리 숲에 피어올랐던 승리의 모닥불은

이제 마지막 온기마저 밤공기에 흩어 보낸 채,

희미한 잿더미로 변해 있었습니다.


축제의 환희는 한 줌의 재가 되었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고향에서부터 날아온

슬픔과 절망의 소식들이었지요.


리나의 단호한 선언이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도 각자의 심장을 지키러 가야 해."


순간 모두의 얼굴에 비장함이 서렸습니다.

리나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바르크와 벨라는

불타버린 숲과 약초의 숲으로,

알루스와 루칸은 그림자의 숲으로,

그리고 가장 위협적인 감시탑이

세워지고 있는 바람의 숲은,

내가 릴리와 함께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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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군단장의 무게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단단한 무언가가 실려 있었습니다.


"리나 대장, 바람의 숲은 제가 가겠습니다.

감시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닙니다.

완성된다면 숲 전체를 감시하고

병력을 통제하는 강력한 요새가 될 것입니다.

정면 돌파와 파괴 공작에는

전사로서의 경험이 많은 제가 더 적합합니다."


리나는 잠시 루인의 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녀는 그의 말에 담긴 군사적 이유와,

그 너머에 숨겨진 또 다른 이유를 어렴풋이 느꼈지만,

굳이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루인은 그런 그녀의 신뢰에 답하듯,

거대한 작전의 밑그림을 펼쳐 보였습니다.


"제가 떠나기 전,

저의 가장 믿음직한 부관 카엘에게

붉은발톱군단의 주력을 맡겨

블롯의 외곽으로 진격하라 명하겠습니다.

이곳 밤의 숲과 도토리 숲의 방어는

리나 대장과 토리가 맡아주십시오."


그의 시선이 지도 위의 대도시,

블롯을 향했습니다.


"카엘의 군단이 블롯의 성문 바로 앞까지 진격해

카르의 숨통을 조이면,

그는 절대 주력군을 도시 밖으로 빼내지 못할 겁니다.


숲으로 뻗어 나가는 보급과 지원은 끊길 것이고,

각 숲에 남아있는 잔당들은 머리가 잘린 뱀처럼 고립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향의 불을 끄고 희망을 되찾을 시간을,

저희 군단이 벌어드리겠습니다."


리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밤의 숲과 도토리 숲은 남편과 제가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동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야."


그렇게 셋으로 나뉜 불꽃들은,

새벽이 오기 전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각자의 길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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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대지와 희망의 새싹

(바르크 & 벨라 팀)


불타버린 숲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거대한 상처 위를 걷는 것 같았습니다.

건강했던 흙은 푸석하게 메마른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생명의 향기 대신

희미한 슬픔이 실려왔습니다.


바르크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의 단단한 어깨는 평소보다 더욱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굳게 다문 입술은 그 어떤 감정도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게 막는 댐처럼 느껴졌습니다.


벨라는 그런 그의 반 발짝 뒤에서 조용히 걸었습니다.

그녀는 바르크의 침묵이 담고 있는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새싹들의 보금자리'는

단순한 어린 나무들의 터전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불타버린 숲의 미래였고,

바르크가 자신의 심장처럼 돌보던

희망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바르크…

너의 마음도 지금 이 땅처럼 타들어 가고 있겠구나..'


벨라의 가슴 한 구석이 시큰하게 아려왔습니다.


아주 오래전 혹독한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

말없이 자신의 망토를 벗어 젖은 어깨를 감싸주던

그의 온기를 느낀 날부터,

그녀의 마음속에는 늘 바르크라는 이름의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때로는 든든한 그늘이 되어주었고,

때로는 가슴 저린 아픔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참을 걷던 바르크가 마침내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의 발치에는 뿌리째 뽑힌 채 검게 그을린

어린 묘목이 힘없이 누워 있었습니다.


바르크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마른 흙이 묻은 묘목의 잎을 조심스럽게 쓸었습니다.


그의 손길은 마치 아이를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손길처럼 애틋했습니다.


"카르가 모든 걸 앗아갔어..

이 어린 나무들이 살아 숨 쉴 기회조차도."


그의 목소리는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낮게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 순간, 벨라는 더 이상 그의 뒷모습만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의 곁에 다가가 함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니야, 바르크."

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녀의 손이 그의 손 위로 조심스럽게 포개어졌습니다.


"생명은 빼앗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야.

이 땅속 깊은 곳 어딘가에선,

분명 작은 씨앗들이 숨죽인 채 온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리가 돌아온 걸, 땅은 분명 알고 있을 테니까."


바르크는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깊은 절망의 그림자 속에서,

벨라는 아주 희미한 빛의 흔들림을 보았습니다.


"예전에 네가 그랬잖아.

가장 강한 씨앗은 가장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씨앗이라고.

기억나?

우리에게 필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마음뿐이라고…

네가 나한테 가르쳐줬잖아."


그녀의 미소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메마른 땅에 피어난 작은 들꽃처럼

강인한 온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바르크는 포개어진 그녀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작은 온기를 느끼며,

아주 오랜 시간 잊고 있던 어떤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치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아주 작은 희망의 새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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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가

(알루스 & 루칸 팀)


그림자의 숲으로 향하는 길목은 그 이름처럼

어둠과 침묵만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뭇잎들은 서로의 몸을 가려 빛을 허락하지 않았고,

발밑에서는 마른 잎 대신 축축한 이끼가 소리를 삼켰습니다.

루칸과 알루스는 그 침묵의 일부인 것처럼 소리 없이 움직였습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루칸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숲의 그림자처럼 낮게 깔렸지요.


"현상금이라니.. 카르가 정말 비열한 수를 썼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건 내부의 의심이니까요.

가장 친한 이웃이,

밤이 되면 나를 노리는 사냥꾼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

그게 지금 우리 고향을 잠식하고 있는 진짜 독입니다."


그의 말에 알루스가 입을 열었습니다.


"공포는 양날의 검일세.

카르는 주민들에게 공포를 심었지만,

그 공포는 역으로 그의 목을 겨눌 수도 있지.

배신자는..

언제나 또 다른 배신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니까."


루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습니다.


"역시 알루스답군요.

항상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군요!!


알루스도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 검을 휘두르려면,

먼저 칼자루를 쥘 믿을 만한 손이 필요할 걸세."


두 사람이 익숙한 오솔길로 접어들자,

루칸이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그 손을 만나러 가는 길로 들어섰군요.

이 길 기억나십니까?

십수 년 전,

덫에 걸려 울부짖던 어린 오소리를 구해줬던 곳."


알루스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기억이 나는구먼.

그 어렸던 오소리가,

이제 그림자의 숲에서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주다니..

은혜를 잊지 않은 충직한 친구일세."


"그녀라면..

지금 이 숲의 진짜 친구가 누구이며,

누가 진짜 적인지 잘 알려줄 겁니다."

루칸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등 뒤를 맡긴 채,

짙어지는 숲의 그림자 속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한때 생명을 구했던 그 길을 따라,

이제는 숲의 생명을 구할 희망을 만나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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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가쁜 산책과 하늘의 흉터

(루인 & 릴리 팀)


바람의 숲으로 향하는 길은 험준한 산길이었습니다.

발을 헛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아찔한 오르막의 연속이었습니다.


릴리는 마치 산양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 나갔지만,

무거운 강철 갑옷을 입은 루인은 그녀를 따라가기가 벅찼습니다.


"헉, 헉.. 잠시만.."


결국 루인이 바위에 손을 짚고 숨을 고르자,

저만치 앞서가던 릴리가 쪼르르 달려와

그의 얼굴을 빼꼼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습니다.


"어이쿠, 우리 용맹한 군단장님, 벌써 지치셨어요?

이래서야 꼭대기까지 어떻게 올라가시려나?"


"무, 무슨..!

이 정도는 산책이나 마찬가지.. 헉, 헉.."


루인은 애써 위엄을 지키려 했지만,

거친 숨결에 목소리가 자꾸만 끊겼습니다.


그 모습을 본 릴리는 와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물통을 건넸습니다.


"산책치고는 꽤나 힘들어 보이네요?

자, 이거라도 마셔요.

그러다 길바닥에 붉은발톱군단장이 쓰러져 있었다는

흉흉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해요?"


루인은 잠시 망설였지만,

타는 듯한 갈증에 결국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올리고

물을 받아 마셨습니다.


땀으로 젖은 그의 얼굴이 드러나자,

릴리는 잠시 웃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굳이 당신이 올 필요는 없었잖아요.

리나 언니랑 왔어도 충분했을 텐데.

그 무거운 갑옷까지 입고 왜 사서 고생이에요?"


루인은 당황해서 급히 물통을 돌려주며 헛기침을 했습니다.


"바람.. 의 숲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니까!

감시탑이 완성되면 숲 전체의 시야가 막히게 되니,

군단장으로서..

당연히 와야 할 곳..이지!"


바람의 미묘한 변화를 읽는 데 익숙한 릴리는

그의 서투른 변명에 담긴 진심을 꿰뚫어 본 듯

다시 피식 웃었습니다.


"풉, 알았어요~ 알았어.

아~주 중요해서 우리 강철 갑옷 군단장님이

직접 행차하셨다 이거죠?

자, 이제 그만 쉬고 갑시다!

이쪽이에요, 이쪽!

또 길 잃어버리지 말고요!"


그녀는 윙크 한번 찡긋하고는 다시 앞서 달려 나갔습니다.

루인은 땀을 닦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퉁명스럽게 대답하긴 했지만,

그녀의 솔직하고 활발한 모습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랜 시간 기억을 잃고 약탈자로 살아오면서,

이토록 강인하고 쾌활한 생명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는 작게 미소 지으며,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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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올랐을까,

마침내 탁 트인 시야와 함께

바람의 숲 능선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풍경의 한가운데,

마치 거대한 흉터처럼 박혀 있는 강철 구조물이

그들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감시탑의 골조는

자유로운 바람의 숨통을 조이는

거대한 감옥처럼.. 보였습니다.




세 개의 불꽃은 마침내 각자의 고향 경계에 섰습니다.

불타버린 숲에서는 잿빛의 냄새가,

그림자의 숲에서는 배신의 냉기가,

바람의 숲에서는 하늘의 비명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불씨들은 비록 흩어졌어도,

모두 같은 바람을 기억하고 있는 법.


그리고 그들의 가슴속에는,

모두 같은 약속을 품고 있었지요.


언젠가 가장 어두운 밤의 끝에서,

서로의 빛을 향해 날아올라

새벽을 여는 하나의 거대한 불꽃이 되리라는 굳은 약속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여정은,

어떤 이들에게는

서로의 등을 내어줄 유일한 방패가 되어야 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서로를 지키려는 애틋한 마음마저 무기로 삼아야 하는,

시리도록 아프고 눈부시게 찬란한 싸움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음 편 이야기 '우리가 지켜낸 것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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