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멈춘 곳
바람의 숲.
거대한 바람이 머무는 정원에
숲이 그저 잠시 깃드는 곳.
침묵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바람에 닳아 없어지는 곳.
이곳은 하늘의 구름과 산맥의 바위,
숲의 나무와 이름 모를 들풀까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부딪히고, 소리쳐야만 했습니다.
하늘마저 눈이 시리도록 짙푸른 강이 되어
끝없이 흘러야 했고,
육중한 산맥은 제 어깨를 들썩여 세월의 먼지를 털어내야 했으며,
너른 초원은 제 몸을 눕혀 거대한 짐승의 털가죽처럼 일렁여야 했습니다.
심지어 작은 들풀 하나까지도 제 운명을 받아들인 무용수처럼 온종일 춤을 추어야 했지요.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
가장 용감한 새조차 둥지를 틀지 못하는
그 고독한 첨탑 근처에는
억겁의 시간 동안 하늘과 땅 사이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듯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이라는 거대한 활시위를
퉁겨내는 듯한,
다른 어떤 소리도 섞일 수 없는
깊고 장엄한 선율이었지요.
허나 그렇게 하늘을 뒤흔들던 바람도,
산허리를 타고 내려와
수천 그루의 나무가 어깨를 맞대고 선
거대한 숲을 만나자
전혀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숲은 그 숨결에 맞춰 살아 숨 쉬는 녹색 바다처럼
장엄하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했고,
숲의 살결을 이루는 낱낱의 잎사귀들은
일제히 몸을 뒤집으며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거대한 연둣빛 파도를 만들어냈습니다.
온 숲을 울리는 '쏴아아아—' 하는 소리는,
바로 그 거대한 파도가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듯한 노랫소리였지요.
바람의 숲에서 바람은 한결같은 모습을
지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머무는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산봉우리에서는 고독한 궁수였다가,
너른 숲에서는 다정한 어머니가 되었고,
고요한 호수에서는 여유로운 몽상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갇힌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성난 야수가 되기도 했지요.
숲을 빠져나온 바람은 이내 깎아지른 절벽 사이,
좁은 협곡으로 흘러들며 제 안에 잠들어 있던
야수의 본성을 남김없이 드러냈습니다.
갇힌 공간 속에서 힘이 응축된 바람은
더 이상 노래가 아닌,
맹수처럼 으르렁거렸습니다.
바위벽에 몸을 부딪칠 때마다 터져 나오는 그 굉음은,
산 전체가 제 목청을 쥐어짜 내며 내지르는
거대한 울음소리 같기도 했지요.
그 격렬한 포효도,
마침내 좁은 협곡을 빠져나와 너른 들판에 이르러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해방된 무용수의 자유로운 춤사위가 되었습니다.
햇살을 받은 억새풀들이 일제히 몸을 눕히며 만들어내는
거대한 은빛 물결은 그 자체로 바람의 바다였고,
그 흐름 속에 서 있는 이는 누구나
자신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선 존재라는 사실을 잊은 채,
깊은 바닷속을 유영하는 작은 물고기가 된 듯한
아득한 현기증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이곳에서 바람은 신나게 내달리는 망아지처럼
경쾌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이 땅에 깃든 생명의 환희와 격동하는 에너지를
온몸으로 노래했지요.
그러다 그 환희에 찬 질주마저 잦아드는
고요한 호수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가장 부드러운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투명한 입김은 거울 같던 호수의 마음 위로
누구도 읽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금빛 글씨를 써 내려갔고,
수면 위를 부유하던 햇살은
비로소 제 빛을 찾아 눈부신 '윤슬'로 피어났습니다.
이 모든 바람은 각자의 음색과 리듬,
그리고 고유한 힘을 가졌지만,
결국 하나의 거대한 노래가 되어
눈부신 낮의 세계를 가득 채웠습니다.
오늘도, 바람의 숲은 그렇게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릴리는 거대한 바위 끝에 위태롭게 앉아,
그 바람의 노래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뺨을 스치는 공기의 결만으로도
바람이 품은 이야기를 읽어냈지요.
어떤 바람은 며칠 전 내린 비의 축축한 기억을 노래했고,
또 다른 바람은 저 멀리 산봉우리에서
막 잠 깬 어린 새의 솜털처럼
가볍고 다정한 숨결을 실어 날랐습니다.
릴리에게 바람은 언어였고,
기억이었으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그녀를 이어주는 투명한 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곁에서 루인은,
마치 난생처음 보는 언어로 쓰인 오래된 시집을 마주한 듯,
이해할 수 없는 경이로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의 강철 갑옷 위를 스치는 바람은 오직 저항과 변수,
숫자로 계산해야 할 적일 뿐이었지만,
그녀에게 바람은 오래된 친구이자
스승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이 그렇게 잠시
각자의 시간 속에서 바람의 노래에 귀 기울이던 순간,
갑자기 릴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 멀리 감시탑이 아닌
그 발밑의 땅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듯했습니다.
"이상해요..."
"뭐..가?"
"바람이.. 저 탑 위에서만 우는 게 아니에요."
릴리가 눈을 감자, 그녀의 모든 감각이 땅 아래,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듯했습니다.
"더 큰 바람이.. 저 탑 아래 갇혀서 울고 있어요.
나가고 싶다고, 하늘로 돌아가고 싶다고…..
땅 전체를 울리며 소리치고 있어요."
그 말에 루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황급히 낡은 지형도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감시탑이 세워진 위치에 희미하게 적힌
고대어 명칭을 발견했습니다.
'하늘의 숨구멍'.
"그런 거였나..."
루인이 나지막이 읊조렸습니다.
"여긴 고대부터 산맥의 모든 바람이 모여
하늘로 솟구치는 거대한 바람 동굴 지대였군.
카르의 건축가들은 그 힘을 동력원으로 삼는 동시에,
거대한 조절 장치로 그 힘을 억누르고 있었던 거야.
릴리가 들었던 바람의 비명은, 족쇄에 채워진 거인의 울음소리였어."
릴리의 눈이 그를 향했습니다.
그 안에는 이제 연민이 아닌,
확신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그 족쇄를 끊어주면요?"
루인의 입가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걸렸습니다.
그녀의 직감이 그의 전략에 마지막 불꽃을 지폈습니다.
"그래. 우리가 잠입해서 그 잠금장치를 파괴한다면,
해방된 바람이 스스로 저 탑에 심판을 내릴 거야."
둘은 절벽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 상처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은 더욱 거칠게 몸부림쳤습니다.
그것은 길을 안내하는 상냥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다가오는 모든 것을 밀어내려는,
고통에 찬 이의 발버둥이었습니다.
릴리는 그 바람의 흐름에 나뭇잎처럼 몸을 맡기며
아슬아슬하게 길을 찾아냈지만,
육중한 강철 갑옷을 입은 루인에게는
바람의 분노가 고스란히 부딪혀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 닿았을 때,
기름 냄새와 뜨거운 쇠 냄새가 뒤섞인 역겨운 바람이
괴물의 한숨처럼 토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저 괴물의 심장은 어디에 있지?"
릴리는 눈을 감고 고통스러운 바람의 울음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습니다.
"몰라요.. 하지만 모든 바람이 저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가장 깊은 곳에서 비명을 질러요.
바람의 흐름을 따라 가장 깊은 곳으로 가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좋아."
그녀를 등 뒤로 보호하려는 듯,
먼저 어둠 속으로 한 발을 내디디며 말했습니다.
"내가 앞서겠다.
바람이 아닌 것은 내가 상대하지."
하지만 그의 육중한 강철 군화가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릴리가 그의 가슴팍을 가로막으며 피식 웃었습니다.
"잠깐, 강철 갑옷 아저씨.
순서가 틀렸잖아요."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 대신,
아픈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을 막지 말라는 듯한
단호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숲의 바람은 내 친구예요.
친구가 지금 저 안에서 아프다고 울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이의 등 뒤에 숨어 갈 수 있겠어요?
친구를 찾아 가장 먼저 위로해 줘야 하는 것도
바로 나예요."
루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내디뎠던 발을 거두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더 깊은 세계의 법칙에 대한 존중이었지요.
그 어둠은 수직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강철의 목구멍 같았습니다.
사방에서 쇠가 긁히는 소리,
증기가 새는 소리가 뒤섞여 거대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냈지만,
릴리는 그 모든 소음 속에서 오직 하나의 가느다란 실,
가장 아파하며 흐느끼는 바람의 신음소리를 붙잡고
아래로, 더 아래로 향했습니다.
루인은 그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릴리의 마음을 믿고,
묵묵히 그녀의 뒤를 지킬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통로의 끝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감시탑의 최하층부,
갇힌 바람이 내지르는 '웅웅'거리는 낮은 공명이었습니다.
그것은 귀로만 듣는 소리가 아니라,
온몸의 뼈를 떨리게 만드는 거대한 생명의 신음소리였습니다.
그 거대한 신음소리가 울려 나오는 근원지를 향해,
둘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모든 기계와 파이프가 연결된 심장부,
바람 동굴의 입구를 막고 있는
거대한 '바람 조절 장치'의 제어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제어실을 향해 첫발을 내디디려던 순간이었습니다.
복도 저편에서 순찰대의 횃불이 어둠을 가르며 다가왔습니다!
루인은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릴리의 손을 잡아끌고,
근처의 육중한 기계 틈새로 몸을 숨겼습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비좁은 공간.
그의 차가운 강철 갑옷이
릴리의 따뜻한 몸에 단단히 밀착되었습니다.
바깥세상의 살아있는 바람은 완전히 차단된 채,
오직 두 사람의 폐부를 오가는 작은 숨결만이
이 작은 세계의 유일한 '바람'이었습니다.
루인은 바로 눈앞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릴리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았습니다.
그녀가 내쉬는 가느다란 숨결이 그의 뺨에 닿았을 때,
그는 이 바람 한 점 없는 강철의 무덤 속에서
숲의 어떤 바람보다도 더 선명하고
부드러운 생명의 숨결을 느꼈습니다.
"강철 갑옷 아저씨,
심장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그렇게 무서웠어요?"
릴리의 장난기 섞인 속삭임에,
루인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육중한 군홧발 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다시 한번 거대한 기계의 공명만이 남았을 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루인이었습니다.
그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릴리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틈새 밖으로 몸을 꺼냈습니다.
".. 이제 시작한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고 거칠었습니다.
릴리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어느덧 장난기 가득한 그녀의 얼굴에서도
미소는 사라져 있었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제어실은 거대한 톱니바퀴와 사슬이
괴물의 뼈대처럼 맞물려,
땅 아래에서 울부짖는 바람의 힘을
힘겹게 억누르고 있는 심장부였습니다.
이곳이 바로, 갇힌 거인의 족쇄였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루인의 지식이 무기가 될 차례였습니다.
그는 잠시 그 거대한 장치의 구조를 꿰뚫어 보듯 응시하더니,
이내 모든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단 하나의 핵심 기어를 찾아냈습니다.
저것이 이 거대한 괴물의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그는 허리춤에서 단단한 강철 쐐기와 지렛대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온 무게를 실어,
그 핵심 기어의 가장 약한 이빨 하나를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 순간, 균형을 잃은 거대한 기계 장치 전체가
괴성을 지르며 멈춰 섰습니다.
족쇄가 풀린 것입니다.
땅 아래에서 갇힌 채 울려오던 바람의 공명이
순식간에 분노에 찬 포효로 변하며,
탑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루인이 막 몸을 돌리던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육중한 강철문이 굉음과 함께 열리며,
횃불을 든 순찰대의 병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침입자들과 병사들.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혔습니다.
찰나의 정적.
이내 병사의 굳었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며,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찢어지는 듯한 외침이었습니다.
"이런, 제대로 찍혔네!"
릴리가 외치며 루인의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둘은 강철의 미로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등 뒤에서는 분노한 병사들의 고함 소리와
육중한 군홧발 소리가 맹렬한 파도처럼 그들을 쫓아왔습니다.
릴리는 바람의 안내를 잃은 대신,
본능적으로 공기의 미세한 흐름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의 울림을 쫓아
복잡한 통로를 헤쳐나갔습니다.
루인은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르며,
좁은 통로를 막아서는 장애물들을
육중한 어깨로 부수며 길을 열었습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더 이상 나아갈 길 없는 막다른 복도와,
절벽을 향해 나 있는 거대한 창문뿐이었습니다.
루인이 투구 아래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등을 돌렸습니다.
복도 저편에서 수십 개의 횃불이
어둠을 밀어내며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포위된 것입니다.
횃불의 빛이 다가올수록 루인의 손은
검자루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습니다.
한 명의 전사로서,
이것은 명백한 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곁에서,
릴리는 절벽을 향해 열린 거대한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절망의 심연이 아닌,
자유로운 바람이 춤추는 광활한 하늘.
릴리가 루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습니다.
그녀는 다가오는 병사들이 아닌,
오직 루인의 눈만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보여요, 루인?
땅의 길이 끝나는 바로 저곳에서,
비로소 바람의 길이 시작되는 거예요."
횃불의 빛은 그들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세웠지만,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거대한 바람은
오히려 그들을 향해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다음 편 '독을 품은 귀한 꽃'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