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내쉰 거대한 숨 끝에서
릴리의 외침은 입술을 떠나자마자,
허공을 할퀴는 거센 바람의 발톱에 걸려 산산이 찢겨나가 버렸습니다.
그 목소리엔 생애 가장 위험한 비행을 앞둔 설렘과
본능적인 공포가 묘하게 뒤섞여 있었건만,
안타깝게도 그 진심이 전달되기에는
바람이 너무나 매정했습니다.
루인에게 닿은 것은
모든 언어를 삼켜버리는 거대한 굉음뿐,
그 소리는 둘 사이를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벽처럼,
매정하게 두 세계를 갈라놓고 있었습니다.
지금 릴리가 발 디딘 곳은,
단단했던 안쪽 세상과 사납게 날뛰는 바깥세상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가장 위태로운 경계선 위였으니까요.
그녀의 온몸을 감싼 적갈색 털들은
이미 아래로 향하는 자연의 무게를 잊어버렸습니다.
미친 듯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바짝 곤두서고 부풀어 오른 그 모습은,
마치 허공을 향해 사납게 타오르는
불꽃 덩어리가 된 듯했지요.
보이지 않는 바람의 결을 따라
온몸의 털이 거칠게 물결치는 광경은,
기묘하고도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
얇은 옷자락 역시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바람의 손길을 따라 허공을 거칠게 후려쳤습니다.
금방이라도 찢겨 나갈 듯 요동치는 옷감은,
마른 장작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마치 사나운 채찍처럼
릴리의 가녀린 몸을 매섭게 휘감았다가
매정하게 뿌리치기를 반복했지요.
그 모습은 마치, 그녀의 존재마저 바람에 흩어져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은
아찔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발바닥에 닿는 돌의 냉기는
컴컴한 바닥의 뱀처럼 소름 끼치게
혈관을 타고 기어올라 심장을 옥죄었습니다.
그 서늘한 공포가 목까지 닿기도 전에,
뺨을 후려치던 바람도 살이 익을 만큼
더 뜨겁고 거칠게 달려들었습니다.
차가운 침묵과 끓어오르는 생명이 사납게 뒤엉키는
그 어지러운 틈바구니에서도,
릴리는 가늘게 뜬 눈으로 바람의 가장 깊은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릴리의 위태로운 발끝을 쫓던 루인의 눈길이,
창틀 너머 입을 벌린 허공 속으로
맥없이 미끄러져 내려갔습니다.
그 아래를 본 순간, 뱃속이 '철렁' 하고 뒤집히는 듯한
아찔한 어지러움이 루인을 덮쳤습니다.
마치 심장이 무거운 납덩이가 되어
가슴의 빗장을 부수고,
저 까마득한 바닥을 향해
제멋대로 곤두박질쳐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릴리의 등 뒤에는 루인이 믿고 디딜 곳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곳은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바닥부터 입을 쩍 벌린 채,
누군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시커먼 죽음의 구덩이 같았습니다.
마치 모든 세상의 빛과 소리가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가는 듯한 거대한 절벽.
그 압도적인 깊이 앞에서 루인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강철 갑옷을 입은 자신조차
이곳에선 한 줌 먼지처럼 바스러져,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져 버릴 수 있다는
끔찍한 두려움을 말이지요.
평생을 묵직한 쇠붙이와
단단한 흙바닥만 믿고 살아온 전사에게,
그곳은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오직 추락만을 기다리는
텅 빈 처형대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길을 내주던 바람은 더 이상
다정한 길잡이가 아니었습니다.
이 바람은 루인의 무거운 갑옷을 단숨에 낚아채
저 까마득한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려고 벼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 같았습니다.
식은땀에 젖은 루인의 손이 창틀을 바스러질 듯 움켜쥐고 있을 때,
차가운 쇠장갑 위로
작고 따뜻한 온기 하나가 살포시 내려앉았습니다.
루인은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끝장인
그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
릴리의 눈동자는 겁에 질리기는커녕 소름 돋을 만큼
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믿어봐요, 루인.
나를, 그리고 당신을 안아줄 이 바람을.
바람 소리에 묻혀 그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맞잡은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맥박 소리만큼은
천둥처럼 쿵쾅쿵쾅 울렸습니다.
막다른 길,
어느새 벌떼처럼 몰려와 모든 길을
포위한 카르의 병사들.
릴리가 루인의 손을 억세게 잡아당겼습니다.
거부할 수도, 아니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
그 끝자락에서 루인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루인은 창틀을 움켜쥐었던 손을 놔버렸습니다.
릴리가 허공으로 몸을 던지자,
루인의 육중한 몸도 자석에 끌려가듯
그 새파란 허공 속으로 함께 곤두박질쳤습니다.
발밑이 푹 꺼지는 순간,
루인을 덮친 처절한 공포.
무거운 강철 갑옷은 마치 지독한 배신자처럼,
그를 바닥 없는 구덩이
맨 밑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루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마디 비명이 채 허공에 흩어지기도 전,
"후우우우우—!!"
대지의 깊은 목구멍, 땅속 가장 깊은 허파에서
오래전 잊혔던 태고의 숨결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거친 바람은 추락하던 두 작은 생명을
마치 거인의 손바닥처럼 턱, 하고 받아냈습니다.
순식간에 루인의 세상에서 위와 아래가 뒤집혔습니다.
그를 짓누르던 무거운 강철 갑옷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졌습니다.
바람은 갑옷 틈새 하나하나를 파고들어,
차가운 쇠붙이를 깃털처럼 바꾸어 놓았지요.
그것은 더 이상 성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둘을 감싸 안고 하늘로 밀어 올리는
거대하고 투명한 젤리 같기도 했고,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묵직한 생명의 물결 같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폭발적인 바람 속에서,
릴리의 몸에 숨어 있던 본능이 눈을 떴습니다.
펄럭이던 겉옷 아래로, 손목과 발목, 옆구리를 잇는
얇고 질긴 '날개막'이 바람을
한껏 머금고 팽팽하게 펼쳐진 것입니다.
햇빛을 받아 붉은 실핏줄이 투명하게 비치는
그 신비로운 날개.
그것은 마치 거대한 꽃잎이 밤하늘에 만개하듯,
둘의 위태로운 추락을 우아한 비상으로
바꾸어 놓는 아름다운 돛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바람과 싸우는 대신,
그 넓게 펼친 날개로 바람의 결을 타고
부드럽게 몸을 뒤집었습니다.
거센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보이지 않는 파도를 타는 노련한 뱃사공처럼
자유로워 보였지요.
릴리의 외침에 루인은 질끈 감았던 눈을 번쩍 떴습니다.
발아래서는 감시탑과 병사들의 횃불들이
반딧불이처럼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추락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땅이 옭아매던 끈을 끊어내고,
오직 바람이 만든 투명한 길을 따라
거침없이 솟구치고 있었지요.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은
어느새 아름다운 노래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 소리에는 땅속 깊은 어둠을 뚫고 나온
바람의 기쁨과,
구름 틈을 스치는 햇빛의 속삭임,
그리고 둘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벅찬 심장 박동이 하나로 섞여 있었지요.
루인은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몸이 땅이 아닌
하늘에 속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온몸이 짜릿하게 떨려왔습니다.
갑옷 틈으로 파고든 바람이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그리고 오랫동안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다 내려놓아라. 무거운 것은 땅에 던져두고,
너는 그저 자유로운 흐름이 되어라.'
릴리가 허공에서 루인의 손을
더 꽉 쥐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노을들이 쏟아질 듯 가까이 다가와 있었습니다.
그 순간 루인은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무서워했던
그 '시커먼 구덩이'는,
사실 그들을 가장 높은 곳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활짝 열려 있던 '하늘의 문'이었다는 것을요.
치솟던 바람기둥이 하늘 꼭대기에서 부드럽게 흩어지는 찰나,
세상은 기묘한 침묵에 잠겼습니다.
마치 세상이 잠시 숨을 참은 듯한,
무게가 사라진 '0의 시간'.
그 아찔한 허공 한가운데서
루인과 릴리는 서로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습니다.
루인의 눈은 생전 처음 보는 풍경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떨리고 있었고,
릴리의 눈은 자신의 세계에 발을 들인 그를 향해
다정하게 웃고 있었지요.
찰나의 눈 맞춤이었지만, 그것은 수천 마디 말보다
더 깊고 진한 대화.
'나를 믿어요.
그리고 당신을 놓지 않을 이 바람을.
몸이 아래로 쏠리는 그 아찔한 순간,
루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습니다.
까마득한 아래, 안개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초록빛 그림자들.
마치 대지 위에 펼쳐진 거대한 우산처럼,
혹은 집채만 한 초록색 지붕들이 겹겹이 쌓인
'거인 잎사귀'들의 숲이었습니다.
루인의 고함이 바람을 뚫고 릴리에게 닿았습니다.
릴리는 루인이 말한 방향으로
날개를 활짝 펼쳤습니다.
땅으로 곤두박질치던 둘의 몸이,
릴리의 날갯짓 한 번으로
저 생명의 초록 지붕을 향해 기적처럼 휘어졌습니다.
몸 전체가 울릴 만큼 묵직한 첫 번째 충돌.
맨 위에 있던 거대 잎사귀가
조용한 비명을 지르며 찢겨나갔습니다.
진한 풀 냄새가 물보라처럼 터져 나왔지만,
숲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거친 손바닥을 내밀어 그들의 맹렬한 추락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잎사귀 하나가 찢어지면, 바로 아래 잎사귀가,
그다음엔 억센 줄기들이 그들을 낚아채듯 휘감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수백 장의 초록색 그물침대가
겹겹이 그들을 받아 안는 것 같았지요.
둘은 흩날리는 잎사귀 파편들과 함께
초록색 폭포수 속을 뚫고 떨어져 내렸습니다.
투박한 잎맥들은 요란하게 갑옷을 긁어내렸고,
겹겹의 잎사귀들은 초록색 소나기가 되어
쉴 새 없이 그들의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마치 숲이 길 잃은 아이들을 되찾아
자신의 가장 깊고 은밀한 품속으로
안전하게 숨겨주는 과정 같았지요.
그리고 마침내,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묵직한 충격과 함께
모든 움직임이 멈췄습니다.
사방을 메우던 굉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찢어진 잎사귀들이 꽃비처럼 내리는 소리와
희미한 흙내음만이 고요하게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찾아온,
숨 막히는 정적.
그 깊고 축축한 초록의 어둠 속에서
둘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숲은 그들을 구원한 것일까요,
아니면 삼켜버린 것일까요?
오직 찢겨나간 잎사귀들만이
그들의 알 수 없는 운명을 덮어주듯,
소리 없이 쌓여갈 뿐이었습니다.
(다음 편 '검은 늪에서 찾은 초록 심장'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