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품은 귀한 꽃
비가 내립니다.
침묵을 잿빛으로 스며들게 하는,
그 시리도록 차가운 비가.
젖은 흙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조용히, 그러나 잔인할 만큼 부드럽게
가장 깊은 심장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는 단순히 나뭇잎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아니라,
희망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떨어지는 소리였고,
오래 간직했던 꿈조차 깊은 바닥에
산산이 흩어지는 소리였습니다.
마치 금이 간 유리 위를 두드리듯,
그 소리는 계속 울렸습니다.
조금만 더 떨어진다면,
이 마음 더 이상 버티지 못해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그런 소리.
하지만 야속한 비는 끝없이 떨어졌고,
희망은 끝내 다 젖어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작은 물웅덩이 속에서
빛을 잃은 별들처럼,
조용히 가라앉으며.
잿더미의 독기를 머금은 탓일까.
빗방울은 더 이상 둥글지 않았습니다.
찢어진 상처처럼 시커멓게 갈라진 하늘,
그 틈새로 쏟아지는 빗줄기는
수천 개의 회색 바늘이 되어
가슴을 파고들었으니까요.
비는 그렇게 모든 소리를 빼앗아갔고,
모든 색깔조차 깨끗이 지워버렸습니다.
저 작은 숨이,
이 비처럼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비가 멈추었을 때,
남아 있을 희망은 과연 몇 방울일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바람도, 나무도, 하늘조차.
모든 것이 끝났다고,
약초 전문가인 자신에게 속삭이던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젖은 시선이 바르크가 지켜낸
세 그루의 작은 나무에 멈추었습니다.
그녀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그 작은 생명체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묘목의 잎사귀를 만져보았습니다.
연약하지만 이 끔찍한 공기 속에서도
꿋꿋이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묘목의 뿌리가 닿은 흙을 만져보았습니다.
분명...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흙.
'검붉은 눈물'은 흙과 물을 타고
지하수맥까지 오염시키는 맹독.
그런데 이 샘터는 어째서...
벨라의 시선이
샘터 너머의 '바위틈'으로 향했습니다.
깨끗한 샘물이 천천히 흘러나오는 그곳.
그녀는 그 틈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습니다.
아주 미세한 떨림,
땅 깊은 곳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여린 숨결.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
젖은 바위 틈새로 뺨을 더 가까이 가져갔습니다.
그 틈새에서, 지상의 재와 유황 냄새와는
완전히 다른, 희미하지만
분명 '살아있는' 깨끗한 흙의 숨결이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 절망의 땅과는 전혀 다른,
작지만 분명한 생명의 신호.
그 순간,
흩어져 있던 모든 조각이 맞춰졌습니다.
이 작은 나무들은 단지 운이 좋았던 게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지상의 독기 어린 공기가 아니라
이 바위틈에서 새어 나오는
'땅 속의 숨결'로 숨을 쉬고 있었던 것.
이 샘물은 오염된 숲의 물이 아닌,
아직 살아있는 '깊은 대지의 샘물'.
지상의 '죽음'과 틈새의 '생명'.
그 모순이 빚어낸 기이한 풍경을 마주하자,
바로 그때, 잊고 있던 스승의 가르침이 벼락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내리쳤습니다.
"벨라, 우리는 이 땅의 독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
다만, 그 독과 함께 숨 쉬는 법을 배울 뿐.
그 독을 품고서도 기어이,
스스로 꽃을 피워내야
다가올 봄을 살아내는 것이다."
벨라의 눈이 반짝 뜨였습니다.
스승님은 이 불타버린 숲에 해독제가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아직 오염되지 않은,
이 독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아는
'저 아래 숲'이라면!
바로 저기로 가야 해.
대지 깊은 곳에서 숨을 내쉬고 있는,
저 숲을 향해.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기어들듯, 그 생명의 틈 속으로 몸을 낮췄습니다.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얽혀 만들어진 틈은
아래로,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였습니다.
그녀는 붙잡을 새도 없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지상의 절망이 아득히 멀어지고,
어둡고 축축한 대지의 깊은 품이
그녀를 안아주는 것만 같았지요.
얼마나 떨어졌을까.
온몸이 뒤흔들리는 충격과 함께
두껍게 쌓인 이끼 융단 위로 떨어진
벨라는, 고통에 신음하며 한참을 누워있었습니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들고 눈을 뜨자,
지상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하늘 대신,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서로를 감싸 안은 천장이
아득히 펼쳐져 있었습니다.
지상의 빗물은 그 뿌리들을 타고,
마치 별이 떨어지듯 '툭... 툭...' 맑은 소리를 내며
이슬이 되어 내렸지요.
그리고 그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난
사방의 벽과 이끼, 기괴한 버섯들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창백하고도 신비로운 초록빛과
푸른빛을 스스로 발하고 있었습니다.
벨라는 떨리는 손으로
옆에 있던 빛나는 이끼를 쓸어보았습니다.
부드럽고, 서늘한 감촉.
그 푸른빛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희미하게 박동하며 그녀의 손길에 응답하는 듯했습니다.
벨라는 일어섰습니다.
깊고 충만한 푸른빛이 그녀를 감쌌습니다.
뿌리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발광하는 이끼 포자가 공기 중에 흩어지는 소리,
저 멀리서 들려오는,
대지 그 자체가 숨 쉬는 듯한 낮은 울림...
이 차갑고 신비로운 빛은,
마치 그녀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
그 '작디작은 씨앗'이 내는 빛과도 같았습니다.
따뜻한 치유의 빛은 아니었지만,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은 '공생'의 빛.
하지만 이곳도 온전하지는 않았습니다.
벨라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녀가 기억하던 약초의 향과,
지상에서 스며든 역한 독의 냄새가 뒤섞여,
살아 있으면서 어딘가 기괴한,
모순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이 깊은 아래의 숲마저...
독은 잠입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내면처럼,
생명과 죽음이 위태롭게 뒤엉킨
또 다른 '전장'.
그녀는 스승의 말을 단서 삼아
'독의 향기'가 가장 짙은 곳을 향해,
발광하는 이끼의 빛을 따라 걸었습니다.
마치 고향 약초의 숲에서
진귀한 약초를 찾아 걷던 그때처럼.
완전히 홀로였지만,
마음만은 설레었던.
얼마나 헤맸을까.
그녀는 마침내 그 '모순된 향기'의
근원에 다다랐습니다.
그곳은 지상의 '검붉은 눈물'이 흙을 뚫고 스며들어,
마치 검은 늪처럼 고여 있는...
지하 숲의 깊은 상처 같았습니다.
주변을 그토록 환하게 밝히던 이끼들조차,
이곳에서는 모두 검게 변해버렸지요.
벨라의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습니다.
"여기까지... 이 깊은 곳까지 오염이..."
절망이 가슴을 무겁게 누르며 고개를 숙인 바로 그 순간,
그녀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검은 늪,
그 중심부에서 모든 독을 흡수한 듯한
뿌리가 뻗어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검은 뿌리 끝에서,
단 한 줄기 피어난 꽃.
잎맥은 늪의 독처럼 검게 타 있었지만,
그 중심부는...
마치 이 지하 숲의 모든 별빛을 모아놓은 듯
눈부신 초록빛으로,
스스로의 심장처럼 맥박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경이로운 생존을 향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독을 품고 피어나는 기적의 약초.
그녀는 그 잎을 조심스럽게 꺾었습니다.
손바닥 위에서, 검은 즙이 번져 나왔고,
그 안에서 초록의 빛이
마치 바르크의 희미한 숨결처럼...
절박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벨라는 다시 한번 깊이 느꼈습니다.
바르크를 살릴 해답은,
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독조차 양분으로 삼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음 편 '그림자의 초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