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시가 나를 다시 쓸 때
사람의 마음엔 김칫독 같은
어둑한 방 하나가 있다네.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추억과
시퍼런 날것의 감정이
제멋대로 숨을 켜켜이 올렸다 내렸다 하는 곳.
처음엔 모두 설익은 배춧잎 같았지.
달콤해 보여 덥석 베어 물면 떫고,
금세 질겨져 입안에서 뚝, 하고 끊어지던
그 젊은 날의 문장들.
뻣뻣하게 고개 쳐들던 고집들은
시간이라는 소금물에 푹 잠재워야지,
아삭대던 자존심조차
숨이 푹 죽어 흐물해질 때까지.
그렇게 나를 비워내야
비로소 양념도 깊이 품을 틈이 생기는 법이니까.
그 고집 꺾인 연한 잎사귀, 마음 틈새마다
유난히 맵고 쓰리던 상처 붉게 치대어 넣으면,
어떤 날의 눈물은 짠 소금이 되고
어떤 날의 부끄러움은 고춧가루가 되어
하얀 살결 깊숙이 독하게 배어들겠지만
두려워 마. 이제 뚜껑을 덮을 시간이야.
이름도, 빛도 없이 캄캄한 항아리 속
깊은 바닥으로 내려가
내가 배추였는지, 슬픔이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때까지 아주 긴 잠을 자야 해.
장독을 등지고 설거지를 하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그 순간에도
시간이라는 장독대는
나 몰래 끄적끄적,
깊은 맛을 내는 시를 쓰고 있었던 거야.
어둠을 견디며 버무려진 밤들과 깊이 배인 추억,
마음 끝에 베이던 슬픔들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서서히 익어가는 동안
내 안의 묽은 여백과 네가 새긴 독한 문장이
서로를 껴안고 치열하게 몸살 앓는 소리가 들리니?
그건 부서져가는 비명이 아니라
기억이 피가 되고 살이 되기 위해
다시 태어나는 숨소리.
마침내 어느 깊은 겨울날,
쓱, 뚜껑을 여는 순간 훅 끼쳐 오는
저 아찔한 향기를 봐.
그 캄캄한 독 안에서 잘 익은 김치 한 송이가
붉은 꽃처럼 활짝 잎을 열고 가만히 올려다본다.
시린 계절 온몸으로 삭혀내고
스스로 가장 뜨거워진 저 붉은 마음.
아, 내가 이 꽃을 만든 게 아니었어.
도리어 이 붉은 꽃이 나를 빚어오고 있었구나.
내가 너를 버무린 줄 알았는데
실은 네가 나를 익혀가고 있었던 거야.
그제야 잘 익은 문장 한 줄이
내 입술을 톡, 건드리며 속삭인다.
자, 이제 너는 충분히 발효됐어.
이제 펜을 들어.
그래, 시(詩)는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온 가슴으로 담그는 기다림이었구나.
김장독 뚜껑을 덮듯, 소란스러운 마음을 가만히 덮어둡니다.
차가운 바람을 피해 깊고 그윽한 곳에 잠기는 시간이야말로
비로소 우리가 깊어지는 계절일 테니까요.
빈 화면을 마주하고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문장을 다듬는 동안,
실은 문장이 내 모난 마음을 부드럽게 다듬고 있었다는 것을요.
내가 글을 빚는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그 문장들이 설익었던 나를 사람으로 빚고 있었습니다.
글을 쓰며 마주한 덕분에,
쓰라린 기억들은 고통이 아니라
나를 맛들게 하는 깊은 양념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까요.
부디 우리의 이 시린 계절이, 살을 에는 추위가 아니라
우리 마음을 가장 깊은 맛으로 숙성시키는
알맞은 온도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맵고 짠 하루를 견뎌낸 우리에게,
우리가 빚어내는 삶의 문장들이
서로에게 가장 맛있는 위로가 되길 빌며.
오늘, 여러분의 마음독에서는
어떤 문장이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