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40일 차
"일찍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덮어놓는다고 문제가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나무라지만 저는 압니다. 당신은 또 미안해서 말을 못 했겠지요. 맞벌이를 하느라 바쁜 딸에게 며칠씩 시간을 내어 달라는 부탁이 힘들었을 겁니다. 불편한 얘기를 곧잘 미루는 당신은 차일피일 미루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러는 게 저와 동생을 몇 배는 더 힘들게 한다는 걸 이젠 모르시지 않겠지요.
우리는 불편한 동행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수술 전 직계가족 동의서에 서명을 하기 위해, 수술 후엔 보호자로서, 당신 곁을 지킬 예정이었죠. 그러고 보니 한때는 당신이 저의 보호자였습니다.
당신은 착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잘생기고 운동까지 잘해서 학창 시절부터 인기가 많았다지요. 인기만큼이나 당신 역시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많아요. 그래서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웠던 걸까요. 거절을 못하는 당신의 우유부단함과 여린 심성은 우리 가족을 종종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모질어야 하는 순간에 모질지 못해서 가족 모두를 곤경에 빠뜨렸고, 할 말을 제 때 하지 못해서 불거진 일의 책임을 애꿎은 엄마에게 돌리기도 했어요.
기억나시나요? 곧잘 자랑하셨죠. 당신이 없으면 일이 제대로 안 된다고, 여기저기서 찾으니 어쩔 수가 없다고. 바깥에서 인기가 좋았던 당신은 대신에 가족들의 마음을 잃었습니다.
당신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영 못합니다. 당신에게 가장 많이 실망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기억나십니까. 당신이 도저히 할 수 없다던 말을 제가 대신 총대를 메서 했던 일 말입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부서질 자존심이 컸던가요? 이십 대의 저는 어렸지만 가족들의 행복이 자존심보다 소중하단 사실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잘 알았습니다.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저는 당신을 체념했고 믿음을 지웠습니다.
여전히 보여지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당신을 봅니다.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본래의 모습을 과장되게 부풀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꾸만 저의 불호가 당신에게서 비롯됐다고 말하는 점을 용서하세요. 하지만 이따금씩 발견합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괜찮아 보이려고 애쓰는 저를요. 이런 제 모습도 당신에게서 온 걸까요? 인정하기 싫었지만 양귀자의 '모순'이라는 소설을 읽다가 한 문장에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내 속에 아버지가 있었다.
저는 착하다는 칭찬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신과 닮았다는 말 만큼이나요. 이런 생각을 한 적 있습니다. 제 나쁜 기질은 다 당신에게서 온 것이 아닐까 하고요.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자꾸만 당신과 제가 겹쳐 보여서요. 어쩌면 저의 자기혐오는 당신에 대한 미움으로부터 싹텄는지도요. 정확히 모든 면이 반대인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남편을 당신께 소개하는 자리였을 겁니다. 그가 왜 마음에 드냐는 당신의 질문에 저는 벼르고 별렀던 말을 칼집에서 빼어 들었습니다.
"아빠와 정반대라서요."
그 얘기를 듣던 당신의 눈은 태어나서 본모습 중 가장 쓸쓸했습니다. 웬일인지 저는 기대했던 것만큼 통쾌하지 않았고 오히려 애써 미소 짓는 당신을 똑바로 마주하기 힘들었습니다. 철없던 소원대로 그 말이 당신 가슴을 깊숙이 찔렀던 걸까요. 당신은 매년 명절마다 저를 그때 그 장면으로 다시 데리고 갑니다.
"O서방은 나랑 달라서 천만다행이야."
당신의 사위 사랑에는 자조가 배어납니다. 웃픈 표정으로 가볍게 넘겨보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때 드렸던 상처가 결코 가볍진 않았을 거란 걸.
더는 그만 미워하고 싶습니다. 당신도 나름 애써왔다고, 본성을 거스르고 책임감 있게 살고 싶어서 아등바등했던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보헤미안의 기질을 타고난 당신이,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은 영혼이, 육 남매의 장남이자 두 딸의 아버지라는 현실에 발이 묶여서 살아온 거라고. 사람, 운동, 사진, 노래, 여행.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가족들에게 온 마음을 다 쏟을 수 없던 거라고. 그탓에 내내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저희는 오랜 세월 서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를 제외한 가족들은 이제 서운함을 내려놓았습니다. 더 이상 기대가 없으니 속상할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과거에 해소되지 못한 감정을 붙잡고 이 글을 씁니다. 당신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기시감이 드는 상황들로부터,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하곤 합니다. 그 시절 묻어뒀던 감정이 알고 보니 지뢰였던 거죠. 다 부식돼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던 거예요.
다행인 건 당신으로부터 나쁜 점만 물려받지 않았단 걸 깨닫게 됐단 겁니다. 단점 못지않게 장점 또한 당신에게서 왔음을 말이죠. 당신을 부정하는 게 제 일부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는 동생의 말에 미움을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쓰기 위해 당신을 얘기합니다. 겹겹이 쌓인 포장지 중 한 꺼풀을 걷어냅니다.
이 편지를 당신에게 건넬 용기는 없습니다. 글에 담긴 적나라한 진심이 어떤 형태로 가 닿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다만 당신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건드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삽시간에 다정함을 벗어던지고 냉혹해지는 발작버튼 말입니다.
당신을 마음껏 애정하고 존경할 수 있는 날을 고대했습니다. 당신에게 좀 더 살가운 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 날이 오긴 올까요. 이런 바람이 때늦은 후회가 되기 전에 우리는... 변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