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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배였다

100일 글쓰기 33일 차

by 뵤뵤


이 년 전 그날 아침은 먹구름이 끼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습기를 잔뜩 머금어 팽창한 구름이 하늘을 빈틈없이 뒤덮었을 뿐이다. 날씨와 상관없이 나는 꽤 기분이 좋았다. 연 초의 바쁜 회계 업무를 모두 마무리 짓고 연차 휴가를 냈기 때문이다. 뒤꽁무니를 쫓아오는 일들을 남김없이 해치우느라 며칠간 야근을 하고, 스트레스 탓에 잠도 좀 설쳤던 거 같다. 두 달간의 압박감은 내려두고 이제 가벼워질 차례였다. 평일 낮의 자유를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계획도 살뜰히 세워두었다. 오전에는 미뤄두었던 안과 검진을 받고, 오후에는 호젓한 차방에서 다식을 즐겨야지.


천금 같은 시간에 안과, 내키지 않지만 안과라니. 오름을 오르거나, 카페에서 시간의 구애 없이 책을 읽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동쪽 끝 성산이나 서쪽 끝 모슬포까지 드라이브를 하는 일정을 오전에 끼워 넣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른쪽 눈의 통증이 가벼이 넘길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해서였다. 시작은 안구건조 증상이었다. 가을이 오는 신호로 받아들일 만큼 안구건조증을 달고 산 지 십여 년이 넘었기에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유독 그 해는 좀 심하구나라고 느꼈을 뿐.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꺼풀 안 쪽과 눈망울이 맞닿은 면 사이에 모래알이 들어간 것처럼 서걱거렸다. 눈물약 한 두 방울로 버티면 되겠거니 싶었지만 제법 심상치 않다고 느꼈던 건 뻑뻑함을 넘어선 통증 때문이었다. 오른쪽만 유독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풀어 오른 듯 묵직했다. 눈꺼풀이 뻐근한 데다 뜨끈하기도 했고. 안구가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안 듯하다.


안구의 통증은 정수리부터 목, 어깨 승모근까지 이어지는 통증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대게 이들은 한 세트처럼 동시에 나를 괴롭혔으니까.

'이것만 끝내자. 이것만.'

하나라도 더 마무리 짓고 홀가분하고 싶어서 동동거리던 때였나. 듀얼모니터를 오래 응시하느라 피로해진 눈으로 화장실 거울에 비친 얼굴에 시선이 닿았을때 깜짝 놀랐다. 거울 속을 바라보는 내 두 눈은 군데군데 실핏줄이 터져서 시뻘건 토끼눈이었다.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이상 신호임이 분명했다.






마흔이 넘으면 정기적으로 안과 검진을 받아야 한단다. 마침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기도 해서 노안을 의심해야 할 판이었다. 안과에서는 과연 어떤 말을 들려줄까. 평소처럼 단순한 시력 검사에 그치질 않고 사방이 컴컴한 방에 들어가라고 하니 불안이 더해졌다. 방에는 세 대의 검사 기계가 놓여있었다. 첫 번째로 했던 시야 검사는 까만 바탕 한가운데 빛나는 점에다 초점을 두고 주변 시야에서 불규칙적으로 깜빡이는 빛을 인지하는 순간마다 버튼을 눌러야 했다.


검사에 임하는 자세는 솔직히 담담할 수 없었다. 좋은 결과를 받고 싶은 욕심이라기보다 안 좋은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으므로 초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빛을 감지했다. 단 하나의 깜빡임이라도 놓칠세라 눈에 잔뜩 힘을 줬더니 눈물이 고였고 버튼을 쥔 오른 손아귀에는 땀이 찼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검사 역시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사를 다 마치자마자 급격히 밀려드는 피로감과 함께 눈물샘 주변에 고였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걱정을 털어내듯 옷 소매로 두 눈가를 찍어 눈물을 닦아냈다.


방의 각 모서리마다 위치한 세 대의 기계를 다 순회하고 나면 남은 건 그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어떤 결과일까. 에이, 별 일 아닐 거야. 괜찮겠지.'




녹내장입니다. 시야 검사 결과에서
약간의 시야 결손이 발견되네요.
안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매일밤
잠들기 전에 넣으세요.



어조와 표정이 일관되게 무미건조한 의사가 감기약 처방하듯이 말을 해서였을까. 녹내장이라는 질환의 무거움이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그냥 '아, 그렇구나'하고 진료실을 나올 뿐이었다. 다만 '시야 결손'이라는 두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약국에 가서 '에이베리스'라는 녹내장 환자의 고안압증 치료 점안액을 받들고도 실감은 커녕 의아하기만 했다.

'녹내장이라고? 노년에 주로 생기는 질병인 줄 알았는데 나한테 유독 일찍 찾아온건가?'

여태껏 안과질환은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기에 나는 생전 초면이었던 녹내장이라는 병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다.






약국을 나와보니 오후에 차방을 들르기 전에 두 시간 정도 시간이 떴다. 아침을 거른 배를 채우기 위해 브런치 메뉴를 하는 카페에 들어섰다. 주문한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를 기다리면서 의사가 매일 점안액을 투여할 때마다 체크하라고 했던 어플을 다운로드하였다. 어플 속에는 나의 무지를 일깨워줄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우선 녹내장에 대한 정의부터 읽기 시작했다.


'녹내장은 당뇨망막변증과 황반변성과 함께 3대 실명 질환 중 하나이며......'


실명, 실명이라고? 두 눈을 비비고 눈을 꿈쩍거리며 다시 읽어봐도 틀림이 없었다. 믿을 수 없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하나의 단어에 온 신경이 사로 잡혀버렸다.


'완치의 개념이 없으며 치료 목적은 단지 시신경 손상을 늦추거나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오, 이런. 눈치 없이 때마침 커피와 샌드위치가 나왔다. 입으로 들어갈지, 코로 들어갈지 모르겠구나.


오늘 아침은 분명 우중충한 날씨와 정반대로 쾌적한 하루가 될 거란 예감이 들었더랬다. 홀가분함이 어찌나 지나쳤는지 발걸음마다 지면과 동떨어진 듯 붕 뜬 기분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그런데 자꾸만 내 기분은 날씨를 닮아갔다. 별 일 아닐 거라고, 지금부터 더 나빠지지 않게 잘 관리하면 된다고. 암만 스스로에게 위안을 건네봤자 내 마음은 자꾸만 퉁, 하고 튕겨낼 뿐이었다.


통증은 아픔을 느끼는 신체 부위를 주인공처럼 각별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태어난 이래로 늘 그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고 별스럽지 않게 당연히 제 역할을 하던 눈이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다. 눈이 보여주는 세상을 잃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날부터 나는 불운한 여지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됐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마냥 해맑을 수 없었다.


9퍼센트의 시야를 잃었다는 결과지를 들고서야 나는 비로소 말할 수 있었다.


실로 눈이 보배였다고.

함부로 대해서 그동안 미안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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