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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표 요리의 추억

퐁당퐁당 100일 글쓰기 43일 차

by 뵤뵤


평일 늦은 저녁, 약속 자리에 나갔다 들어오니 진한 라면 냄새가 나를 맞이했다.


'이런 또, 또, 드셨구먼. 냉장고에 분명 반찬이 있을 텐데 말이야.'


우리 집은 나만 없으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식후에 아이스크림까지 챙겨 먹는다. 아이가 라면을 먹기 시작한 때부터 줄곧 변함없는 의식이다. 잔소리할 사람이 나가줘서 마음이 편한가. 이쯤 되면 엄마 없는 기념식으로 봐도 무방하다.


자세히 보아하니 라면만 먹은 게 아닌 거 같다. 주방 싱크대에 놓인 냄비 그릇에 덕지덕지 눌어붙은 면과 밥알이 국물에 야무지게 밥까지 말아먹었다는 심증을 굳혔다.


"라면 먹었네?"


한 마디 던졌을 뿐인데 남편이 쪼르르 달려와 레시피 설명을 한다. 딱히 묻지 않았는데, 그렇게까지 안 궁금한데. 먹고 남은 라면 국물에 현미밥과 계란 두 개를 풀어 보글보글 라죽을 끓였단다. 거기다 냉동실에 있던 닭안심과 고등어구이를 에어프라이어로 데워서 곁들여 먹었단 얘기를 기일게- 늘어놓았다.

와, 진짜로 안 물어봤는데. 안 궁금했는데.


"그래서, 건강하게 잘 챙겨 먹었단 얘기가 듣고 싶은 거야?"

"응."

"탄단지가 나름 조화로웠네."

"응!"


남편이 허허허 소리 내어 수더분한 미소를 보인다. 장황한 설명으로 선수를 친 덕에 나의 잔소리는 면했다고 생각할 테지. 이제는 표정만 봐도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이 되니 선제 방어가 가능해진 탓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고수가 되어감을 이럴 때 느낀다.


하지만 이번에는 틀렸다. 나는 잔소리하고픈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다. 언뜻 스쳐간 찌푸려진 인상은 '기왕이면 설거지도 해줬으면 좋으련만'이란 생각이 투영된 결괏값이다. 당신, 이번엔 헛다리 짚었어.


간편하려고 먹는 라면 가지고 굳이 굳이 변종 레시피를 찾아 시도해 보는 부지런함으로 밥과 밑반찬을 골고루 챙겨 먹으면 더 좋았겠지만, 십 년을 같이 산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내려놓았다.


어릴 적 "아빠는 짜파게티 요리사"라는 광고 카피가 심어놓은 향수처럼 아이는 라면을 보면 곧 아빠를 떠올릴 것 같으니까. 우리 집 아빠는 라면에 쌈장도 풀었다가, 밥도 볶았다가, 계란죽도 끓였다가. 라면 앞에서는 실험 정신을 마다하지 않는 요리의 고수가 틀림없으니까. 게다가 그 실험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아빠, 진짜 맛있어!"

아이가 쌍따봉을 거듭 날리며 부른 배를 두드리는 것으로 식사가 마무리되니 말이다. 나트륨 섭취량을 고려하며 한강물 라면을 끓이는 엄마에게는 절대 라면 끓여달란 말을 안 꺼내는 아이를 보면 우리 집 공식 라면 요리사는 아빠가 틀림없다.






나에게도 아빠와 요리에 얽힌 추억이 있다. 국민학교 시절, 얼굴을 자주 보기 힘들던 아버지가 웬일인지 우리 자매와 함께 종일 집에 계셨다. 어머니가 직접 식사를 챙겨주지 못하는 날에는 개다리소반에 한 상 차려 밥상보를 덮어 놓으셨지만 그날은 희한하게 보이지 않았다. 점심을 챙겨 주던 엄마도, 밥상도 모두 부재중이었다.


모든 상황이 어렴풋하기 짝이 없지만 그날은 유난히 특별한 날이 맞았다. 아버지가 가스불 앞에 선 모습을 처음 보았으니까. 밥상머리에 앉아 신문을 넘기던 아버지가 부엌을 누비며 요리하는 모습이 어린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냉장고 문을 벌컥 열어 칸칸이 먹을 만한 재료를 훑어보던 아버지는 호기롭게 장담하셨다.

"아빠가 또 한다면 한다. 진짜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기다려 봐라."

고작 국민학생이었지만 나는 왜 슬금슬금 불안했던지. 아버지의 요리에 기대와 의심을 반반씩 품고 진귀한 풍경을 지켜보았다.


"에헤이, 된장을 못 찾겠네. 안 되겠다 이거라도 넣자."

쌈장을 집어 한 국자 가득 냄비그릇에 투하하던 아버지를 보면서 어린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비록 전날 지은 눌은밥과 함께였지만 아빠표 쌈장찌개의 맛은 가히 두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다. 시판 쌈장의 조미된 단짠의 조화로움이 일반 된장찌개의 구수함과는 색다른 감칠맛을 냈다.


나와 동생은 두 말 않고 밥그릇을 싹싹 비워 먹었다. 기대 이상으로 밥도둑이었다.

"어떻노. 맛있제? 맛있제?"

아버지는 잘 먹는 아이 둘의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이후로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밥상을 차려준 기억은 없지만 그 단 한 번의 장면이 마음속에 또렷이 남았다. 여전히 마트에서 초록색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시판 쌈장을 보면 아빠표 쌈장찌개의 달큰하고 칼칼한 맛이 떠오를 정도니까. 지금 아버지에게 해달라고 하면 그 맛이 날까? 아빠는 그때를 기억하실까?






음식은 추억을 소환하는 향수와 같다. 아빠표 요리하면 내가 쌈장찌개를 추억하듯이 아이는 아마 라면볶음밥, 라죽, 쌈장라면을 떠올릴 거다. 아이가 아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나보다는 훨씬 다채롭고 두터웠으면 좋겠다. 남편은 그런 면에서 이미 훌륭하고 고마운 아빠다.


엄마의 잔소리가 없는 식탁에서 자유를 누려서 그런가. 식후 디저트로 혈당 스파이크까지 두둑이 챙긴 아이의 표정이 밝아 보인다. 그래, 맨날 먹는 라면도 아닌데 눈치 주지 말자. 배부르고 즐거웠으면 그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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