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꼭대기엔 구상나무들이 사는 숲이 있었어요.
그 숲엔 눈처럼 하얀 이끼가 덮이고, 바람은 늘 솔솔 노래를 불렀지요.
그곳에 ‘낭이’가 살았어요.
낭이는 구상나무의 요정이에요.
나무가 태어날 때 함께 태어나고,
나무가 떠날 때도 함께 눈을 감는 존재지요.
낭이에게는 단짝들이 있었어요.
하영이, 보롬이, 지슬이, 그리고 오래된 구상나무 증조할머니, 영실.
그들은 바람결에 웃고, 빗방울에 춤추며 평화롭게 살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나무꾼들이 산에 올라왔어요.
“다른 나라에 너희 구상나무들을 옮겨서 크리스마스트리로 팔 거야.”
그 말과 함께 지슬이가 깃든 나무와 몇몇 다른 친구들이 트럭에 실려 떠나버리고 말았어요.
그날 이후 숲은 조용했어요.
텅 빈자리는 잡초만 가득 자랐고, 햇살은 점점 뜨거워졌어요.
제주의 여름이 길어지고, 바람이 따가워지자 영실 할머니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어요.
너무 더운 곳에서는 구상나무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이건… 우리 잘못이 아니란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과 함께, 할머니는 솔방울 하나를 낭이의 손에 쥐여 주셨어요.
그 솔방울은 오색빛으로 반짝였어요.
낭이가 조심스레 귀를 대니, 낯선 목소리가 속삭였지요.
“백록담의 뿔... 그 뿔이 한라산을 살릴 것이다. 그 뿔의 주인은 너다. 돌의 정령들에게 가거라. 그들이 지도를 갖고 있을 거야.”
낭이는 겁이 났어요.
돌의 정령들과 구상나무 요정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하영이와 보롬이는 말했어요.
“낭이, 우리가 같이 갈게!”
낭이는 두 친구랑 돌의 정령들에게 가서 백록담의 뿔을 찾는 일을 도와달라고 말했어요.
처음엔 반대하던 돌의 정령들도 낭이와 친구들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도와주기로 결심했지요. 점점 죽어가는 한라산 식물들을 살리는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셋은 한라산 꼭대기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어요. 비바람이 몰아쳐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낭이는 솔방울을 꼭 쥐고 걸었어요.
마침내 백록담에 다다랐을 때 커다란 천 년 묵은 무당개구리가 나타나 낭이를 덮쳤지 뭐예요!
돌의 정령들이 마취액을 뿌려 잠시 개구리를 재웠어요.
“서둘러야 해! 곧 깨어날 거야!”
셋은 백록담에 고인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어요.
깊고 깊은 물속, 숨이 막힐 듯했지만
신기하게도 물 밑 동굴 안에서는 숨을 쉴 수 있었어요.
동굴 깊숙한 저 멀리 반짝이는 빛이 보여요. 그 빛을 향해 헤엄쳐갔지만,
이번엔 피라냐 무리가 길을 막았어요.
낭이는 다시 마취액을 꺼냈어요.
"조금만 참아줘, 백록담의 뿔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피라냐를 물리치고, 드디어 낭이는 반짝이는 뿔을 손에 넣었어요.
낭이는 산 아래로 내려가 영실 할머니가 잠든 땅 아래 백록담의 뿔을 묻고 기도했어요.
그 순간, 숲이 빛났어요.
죽은 줄 알았던 나무들이 하나둘 푸른 숨을 쉬었지요. 바람이 노래를 부르고, 새들이 춤을 췄어요.
그날 이후로,
한라산 구상나무 숲에서는 단 한 그루도 말라죽지 않았고, 단 한 그루도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았어요.
한라산 나무들과 정령들은 오래오래 평화롭게 살았답니다.
요즘 아이와 함께 그림책 만드는 미술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자연물을 사용해 만든 모빌을 보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볼까 같이 궁리했지요. 아이는 때마침 학교에서 배운 "구상나무의 멸종 위기"가 꽤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기승전결 한 문장씩만 떠올려도 만족스러울거라 생각했는데, 신이 나서 세심한 이야기까지 떠올리는 아이의 열정에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구상나무 정령들의 이름은 모두 제주어에서 빌려왔답니다.
낭: 나무
하영: 많이
보롬: 바람
지슬: 감자
한라산 영실, 진달래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 구상나무 자생지가 있는데요.
구상나무는 소나무과이며 제주어로 쿠살낭(쿠살-성게, 낭-나무)이라고 불려요.
서양의 식물학자 윌슨이 채집하고 변종시켜서 전 세계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가장 많이, 가장 비싸게 팔리는 나무가 되었지요. 지금 우리는 그가 개발한 구상나무 크리스마스트리를 사려면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구상나무가 국제적으로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되었다는 겁니다. 원래 한대지방이 고향인 고산식물이기 때문에 기후 위기로 인해 기온이 상승할수록 구상나무가 살기 힘들어지는 거래요. 한라산의 구상나무 숲을 가면 멸종의 과정으로 여기저기 쓰러져 고사목이 된 구상나무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 참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주 편" 유홍준 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