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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청소

100일 글쓰기 31일 차

by 뵤뵤


보름 전쯤 시월의 열대야라는 글을 써서일까. 제발 오라고 오라고 노래를 불렀던 가을이 습격했다. 반길 겨를 없이 겨울에 바통을 넘기고 꽁무니를 뺄 참인 듯 보이지만. 이런 괘씸한 녀석.


https://brunch.co.kr/@byobyolina/211



아직 나는 가을을 실컷 누리지 못했다.

고작 몇 번의 산책과 몇 번의 달리기로 해소될 갈증이 아니다.


새털로 뺨을 간지럽히는 듯한 보송한 바람을 원 없이 쐬고, 버스를 타고 한라산을 물들인 단풍 구경에 넋을 잃고, 해 질 녘 노을 지는 바닷가에서 맥주 한 캔은 마셔줘야 하는데.


아침저녁으로 예고 없이 차가운 공기가 폐 속에 들어찰 때, 뺨마저 조금 시리다는 생각이 들 때, 서운함을 감출 수 없다.

버스를 타고 한라산을 넘나드는 코스는 아이와 함께가 아니라면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을 거 같은데, 머리 굵은 아이는 산에 가기 싫다 하니 올해는 물 건너 간 거 같다.

해 지는 시간이 성큼 앞당겨진 바람에 퇴근 후엔 벌써 노을이 약 올리듯 붉은 꼬리만 남기고 자취를 감춰버린다. 주황빛 하늘을 바라보면서 맥주 한 캔 하는 로망은 이렇게 또다시 내년으로 미뤄야 하나.






오래간만에 대대청소라는 걸 했다. 원래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냥 대청소가 아니라 대, 대청소를 하는데 앞에 '대'가 하나 첨가된 이유는 그만큼 해야 할 수고가 몇 배 늘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하절기에서 동절기로 넘어가는 시기는 더위에서 추위로, 정반대의 날씨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옷장 정리가 빠질 수 없다.


올 가을은 '대대청소의 날'언제로 잡을 것인지 예측이 불가할 정도로 폭염이 길었다. 서늘했다 다시 더워지는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썸 타는 시기에 밀당 당하는 연애초보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11월의 첫날을 대대청소의 날로 정한 우리 가족은 노동 현장에 투입할 전력을 비축하기 위해 전날 밤 저녁을 먹고 와플까지 배부르게 해치우는 먹성을 발휘했다. 그래놓고 막상 다음날이 되자, 일제히 여덟 시에 일어나기로 했던 약속은 까먹은 듯이 아주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야 말았다. 길었던 여름만큼 완수해야 할 집안일이 산더미라 뒷걸음질 치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더는 도망칠 데가 없다. 바쁜 일상 속 쉼표라며 사소하게 게으름을 부렸던 대가가 빚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니. 다시 사람 사는 집으로, 쾌적한 집으로 돌려놔야 하지 않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걸리적거리는 번잡스러움이 집에서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없도록 방해하니까 말이다.


제일 먼저 침대 시트와 소파 커버를 싹 벗겨내고 세탁기에 돌렸다. 그리고 건조기에 돌린 뒤 진공 압축팩에 넣어 바짝 부피를 줄였다. 반대로 올해 봄, 압축팩에 가둬놨던 동절기 이불과 시트에게는 원래의 부피를 되돌려 주었다. 바스락거리는 새 이불의 감촉으로 숙면의 달콤함을 예감하면서.


민소매, 반팔, 반바지. 여름옷들은 일제히 옷장 제일 구석으로 자리를 비켜나 긴 팔 티셔츠와 긴 바지, 카디건과 니트에게 목 좋은 자리를 양보했다.
너저분하게 방치됐던 잡동사니들은 종량제 봉투에 미련 없이 쓸어 담아 버렸다. 과부하가 걸린 물리적 공간을 더는 두고 볼 수 없기에 물건에 부여한 의미와 애착은 마음속 방에만 고이 남겨두었다.
길어진 아이의 팔과 다리를 다 덮지 못하는 짤막한 옷들은 '아름다운가게'에 기부할 용도와 아는 동생에게 물려줄 용도로 분류해서 내놓았다.


여름 내내 습기를 머금어 눌어붙었던 먼지와 묵은 때까지 말끔히 밀어내고 나니 집이 새 옷을 입은 듯 제법 단정해졌다. 장장 대여섯 시간이었을까. 맥시멀리스트의 표본 같던 집이 몸피를 줄여 단순해졌다. 미니멀리즘의 발끝엔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딱 이 정도가 우리 가족의 최선임을 알기에 그만 정리를 마무리짓는다.


몹시 시장해졌다. 집밥까지 할 체력은 몽땅 바닥나버렸으므로 오후 세 시의 늦은 점심은 햄버거 세트로 당첨이다. 가을맞이인지, 겨울맞이인지 모를 대대청소를 끝내고 먹는 햄버거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철저한 분업으로 죽이 잘 맞았던 서로의 수고를 다독이며 제로 콜라 한 모금을 쭉 빨아 마신다.



캬하-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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