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34일 차
안과 진료실 문을 닫고 나올 때마다 어쩐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유급 휴가를 써서 가는 만큼 성의 있는 진료를 기대하는 내가 욕심이 과한 건가. 삼 개월 혹은 육 개월마다 정기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의사는 오늘도 어김없이 딱딱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군더더기 없는 두 문장을 던진다. 마치 형용사와 부사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안압은 유지되고 있네요."
"에이베리스 쓸게요."
그는 녹내장을 진단받고서 한동안 즐겨 찾았던 유튜브 속 의사들과는 온도 차가 많이 났다. 내가 만난 미디어 속 의사들은 저마다 녹내장이 유발하는 최악의 경우인 '실명'에 방점을 찍고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곤 했으니까. 걱정과 불안에 쉽게 전염되는 나는 그들 때문에 심란함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그 심란함이 내 처지를 비관하게 만들고, 과한 자기 연민을 자아냈다. 그래서인지 모른다. 차가울 정도로 덤덤한 그의 진료에 가끔 위안을 받은 까닭은. 검진을 받고 온 날에는 내 질병을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의사로부터 무덤덤함을 빌리고 싶었다.
처음에는 미덥지 않았다. 점안액을 규칙적으로 넣으라는 지시 외에는 설명이 불친절한 건 사실이었므로. 뭘 알아야 질문을 할 텐데 배경지식이 백지상태인 내가 무언가를 물어서 부가적인 정보를 얻기는 힘들었다. 그의 진단을 믿기 싫었던 건지, 의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녹내장 전문의가 있는 대학병원 안과를 찾아갔다. 실망스럽게도 오진이 아니었다. 대학병원에서조차 최초의 진단과 처방이 맞다고 했다. 처음 진단을 받았던 동네 안과와 대학 병원의 검사 기계가 별 다를 바 없었으니 믿을 수밖에. 왕복 두 시간을 소비해 찾아간 대학병원에서 그나마 얻은 수확은 '안심'이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다행'을 말해줬으니까. 녹내장은 시신경 손상 정도에 따라 초기, 중기, 말기로 나뉘는데 내 경우는 극초기에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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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내장은 시신경이 손상되면서 시야가 점차 좁아지다가 실명에 이를 수 있는 질병이다. 안압이 정상 범위(10~21mmHg)를 벗어나 증가하면 시신경이 손상될 수 있는데 문제는 시신경이 손상됨을 자각할 수 있는 뚜렷한 징후가 없다는 점이다.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거나 시야 결손을 스스로 느낄 정도가 되었을 때는 이미 중기나 말기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의 초기 안압은 좌우 모두 11~14mmHg로 정상 안압 범위였다. 정상안압 녹내장은 한국인에게 가장 흔한 경우라 한다. 안압이 정상인데 시신경 자체가 예민하거나 약해서 쉽게 손상된다. 그래서 서서히 시야가 좁아지고 시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극초기에 발견한 나 같은 경우는 천운이라 할 수 있겠다. 시야 검사 결과지에 따르면 내 시야 결손은 왼쪽 눈이 2%, 오른쪽 눈이 9% 정도 진행 중이었다. 더 이상 시야 결손이 진행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면 실명에 이를 확률은 드물다고 했다. 그렇다면 '잘' 관리하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찾아보니 할 수 있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게 몇 배는 많아서 심란함이 더해졌다.
권장 사항
정기적인 안과검진
녹황색 채소 섭취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
매일 자기 전 고안압 치료 점안액 투여
금기 사항
금연
절주
고지방, 고혈당 음식 자제하기
고카페인(하루 커피 3잔 이상) 음료 자제하기
어두운 곳에서 PC화면이나 스마트폰 보지 않기
머리를 오래 숙이거나 엎드리는 자세 피하기
누운 자세로 스마트폰 보지 않기
무거운 물건 들지 않기
복압을 상승시키는 동작(물구나무서기와 고중량 근력 운동 등) 하지 않기
조이는 옷차림(넥타이, 허리띠, 물안경) 착용하지 않기
강하게 눈을 압박하는 마사지하지 않기
시신경을 보전하는 관건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혈액 순환이 원활해서 시신경 말단까지 피가 잘 전달되어야 하고 둘째, 안압을 정상 범위 또는 그 이하로 유지하는 것이다. 대충 보아도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비만 등과 같은 성인병 예방법과 유사하지 않은가. 눈 역시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우리 몸의 일부이고 모든 기관이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앞으로 평생 이것들을 다 지키며 살 수 있을까? 아니, 다 포기하고 살 수 있을까? 구움 과자에 진한 카페라테 한 잔의 여유를, 하루의 고단함을 맥주 한 잔으로 씻어내던 상쾌함을, 유튜브와 브런치를 종횡무진하며 충족했던 도파민을 정말로 포기할 수 있나? 게다가 녹내장 진단을 받던 당시에 필라테스를 수강하는 중이었다. 미리 결제해 놓은 수업이 몇 회차가 남았지만 안압과 복압을 상승시키는 동작을 빼고 나면 수행할 수 있는 동작이 과연 몇 개가 될지 의문이었다. 비싼 수강료만큼 운동을 마음 편히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나를 암울하게 했다. 관리 방법을 찾았을 뿐인데 삶의 낙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의사 선생님은 위와 같이 장황한 주의사항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주의를 주기 시작하면 1절, 2절, 3절이 될까 봐 말을 아꼈던 것일까. 왜 다른 의사들이 하는 그런(?) 당부를 하지 않는 건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던 나는 직접 물었다. 이것만은 꼭 지켰으면 한다는 점이 무엇인지를. 그는 거두절미하고 딱, 세 가지를 말했다. 정기 검진, 점안액 투여, 스트레스 관리.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 말라는 것들을 신경 쓰느라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했다. 내심 콕콕 찔렸다. 이미 그러고 있는 걸 눈치챈 듯 했다.
눈이 아프지 않으려면 모니터를 보는 시간을 줄여야 하는 것이 맞다. 하고 많은 스트레스 중에 글 쓰는 스트레스 하나라도 덜어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도 매일 쓰겠다고 모니터를 오래오래 쳐다본다. 그런데도 매일 쓸 거라고 머리를 싸맨다. 왜 이런 모순된 선택을 하고 행하고 있는 건지,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