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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각형이 아니어도 괜찮아

100일 글쓰기 38일 차

by 뵤뵤


어제 저녁까지는 완벽한 하루임에 틀림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마쳤고, 뿌듯함을 주체 못 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오운완 인증을 했으며, 아침과 점심에는 탄단지가 고루 균형 잡힌 도시락을 챙겨 먹었고, 밀도 높은 집중력을 요하는 일을 신속하게 처리했다. 퇴근길에 아이와 함께 독감 예방접종까지 마쳤으니 오늘의 숙제는 끝인데. 아, 아니다. 여태 글을 못 썼네. 브런치의 글 발행까지 마쳐야 어제 하루,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나 보다. 분명 집에 오자마자 씻고 글부터 쓸 생각에 PC의 전원 버튼을 눌렀는데. 분명 소파에 앉아 십 분만 책을 읽을 참이었는데. 그 후로 한 시간이 기억에서 삭제 돼버렸다. 꿈쩍꿈쩍 눈을 뜨니 시곗바늘은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럼 그때부터라도 글을 쓰면 될 텐데, 새벽 근력 운동의 여파로 근육들이 너나 할 거 없이 '나 여기 있소'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이대로 쭈욱 잠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저녁 여덟 시의 나와 밤 아홉 시의 나는 어쩜 이리 다른 사람인건지. 피곤하면 글 쓰는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고 합리화하며 그렇게 난 찜찜하게 이른 잠에 들었다.






덕질 좀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육각형 아이돌'이란 말이 있다. 노래·춤·예능감·외모·인성 등 여러 분야에서 두루 뛰어난 아이돌을 일컫는 표현인데, 게임으로 치자면 사기 캐릭터 같은 거랄까. '육각형 아이돌'이란 수식어는 아무한테나 붙여주지 않는다. 어디 한 군데 모자람 없이 인정받은 아이돌에게만 주어지므로 그만큼 귀하디 귀하다.


나는 '육각형 아이돌'이 실존한다는 점이 경이로우면서 한편으론 가혹하단 생각이 든다. 아이돌이란 어원 자체가 이미 그리스어로 '우상'이라는 뜻인데 거기다 육각형이라니. '매사에 완벽'에 가깝다는 건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겨서일까. 완벽에 가깝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반드시 취약한 영역이 있을 것만 같다. 사람이니까, 사람이라서.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어쩌다 실수를 하면 그들이 나와 같은 사람이었음에 안도하며 '인간적'이라 덧붙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육아, 살림, 일, 운동, 독서, 글쓰기. 이 모든 걸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내며 사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만, 실상은 다르다. 매일 적게는 두 가지, 많게는 네 가지 이상을 놓치고 산다. 언젠가부터 육각형 아이돌처럼 육각형 엄마가 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을 완벽하게 살 수 없는 이유를 단순히 꼽자면 첫째는 시간이요, 둘째는 체력 때문이다. 몸이 하나니까.


여섯 가지를 다 잡고 사려면 잠을 줄여서라도 시간을 벌어야 할 텐데, 잠을 포기했다가 일상 전체가 삐걱거리는 낭패를 보았다. 시행착오를 통해 깨달은 점은 그나마 여러 역할을 두루 만족스럽게 수행하려면 잠을 잘 자고, 잘 먹고, 운동을 빼먹지 말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곡차곡 다져놓은 체력이 빛을 발할 때 능력치를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이 또한 경험이다.


육각형 엄마가 될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잠들기 전, 무언가를 하나 놓친 것만 같은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럴 땐 놓친 것에 매달리기 보다 지켜낸 것을 떠올리는 편이 훨씬 이롭다.


어제의 나는 체력이 바닥난 탓에 집밥 대신 외식을 했고, 피로함을 이기지 못해 결국 글쓰기를 놓쳤다.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꼴이라 영 마음에 안 들지만 그렇다고 오전과 오후를 성실히 보낸 시간이 무용해지는 건 아니다.


어제의 나는 무거운 몸과 뻑뻑한 안구 건조를 견디고 캄캄한 새벽, 헬스장으로 갔다. 가벼운 중량으로 편하게 운동을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요령 피우지 않고 무거운 덤벨을 들었다. 직장에서는 애초에 목표로 한 업무량 이상을 집중력 있게 해치웠다. 육아는 어디 보자, 일단 독감 예방접종을 미루지 않고 맞췄으며 아이의 눈을 보고 함께 웃고 떠들 수 있어서 감사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젯밤 잠들기 전부터 오늘 아침 눈뜰 때까지 이어졌던 찜찜함을 시원하게 털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기분 관리에 정신 승리는 탁월한 방법이다.






누군가가 자책을 할 때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위로해주곤 했다.


"괜찮아요. 어떻게 사람이 다 잘하고 살아요."


타인에게는 아낌없이 나오던 말이 왜 자신에게는 그리도 박한 건지.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와 욕심이 과한 탓일까. 그러고 보면 자책도 습관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나는 너무 쉽게 나의 부족함에 주력한다. 터무니없이 쓸데없게. '육각형 아이돌'이란 수식어에 가혹함을 느끼는 안타까움처럼 나를 쉬이 애틋하게 바라봐주지 않았다. 잘했을 때뿐만 아니라 열심히 한 자신을 보듬어야 한다. 아낌없이 말해줘야 한다.



육각형이 아니어도 괜찮아.
지금 너로도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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