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당퐁당 100편 글쓰기 44화
혼자 덩그러니 남은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눈물이 났다. 가을을 닫고 겨울을 여는 변덕스러운 11월, 나는 스산한 추위만큼 제어할 수 없는 우울함 때문에 몸을 떨어야 했다. 때로는 답답함이 눈물을 불렀고, 때로는 불안이 눈물을 불렀고, 때로는 그 흘린 눈물을 닦아내고 명랑한 척을 해봤고.
'다들 먹고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감수하며 살아간다'라는 예사로운 말은 더 이상 위안 삼기 힘들었다. 왜 일의 기쁨은 고작 이 할이면서 일이 주는 울화는 팔 할인건지. 남편은 회사에 불만이 생기면 털어놓으라고 했지만 사람 자체가 바뀌지 않는 고질적인 문제를 매번 문제 삼을 순 없는 노릇이다. 박 씨 가족들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홀로 이 씨인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며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불경기에 일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로 감사함을 억지스럽게 되뇌어야 했다.
올 한 해 잘 참고 웃어넘기던 지난 10개월간의 인내심이 연말에 임박해서 바닥났는지 모른다. 마음이 내 맘 같지 않은 게 내 잘못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 억울한데. 성숙한 어른답지 못하다는 자책이 시시때때로 고개를 들어 회초리를 휘둘렀다. 마음 놓고 우울해보지도 못하는 이 각박한 성격. 나는 타인에게는 감히 못할 말을 스스로에게 함부로 내뱉는 경향이 있다.
다 내려놓고 싶었다. 그렇다고 진짜로 다 내려놓으면 큰 일 나니까, 뒷감당은 오롯이 내 몫이기에 잠시 잠깐만 내려놓기로 했다. 아이가 아파서 아니고, 집 안의 경조사 때문도 아닌, 온전히 나만을 위한 4일간의 휴가를 쓰기로 한 것이다.
회사와 남편에게 뚜렷한 명분 없이 휴가를 고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쉬지 않으면 정말 머리를 쥐어뜯으며 엉엉 울어버릴지 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11월 들어서 남몰래 두 번을 그렇게 울어봤다) 전환이 필요했다. 가늘고 긴 직장 생활을 위해 피할 수 없는 단계라고 여겼다.
"그래서, 오늘 뭐 할 건데?"
"비밀이거든? 말 안 해줄 거야."
"우와, 좋겠다. 회사 안 가서."
남편은 알까? 저런 장난스러운 농담 한 마디조차 나에겐 부담이 된다는 걸. 같이 쉬고 싶어도 그러질 못하니 부러워서 하는 말인걸 잘 알지만 말이다. 나는 애써 미안함을 털어버리려고 오늘의 행적을 그에게 철저히 감추기로 했다. 나 홀로 소리소문 없이 발길 닿는 데로 사라져 버릴 테다. 그래봤자 아이 귀가 시간에 맞춰 제깍 돌아올 테지만.
우울과 무기력에 잠기지 않으려고 저항하느라 고단했던 마음을 쉬게 해주고 싶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널을 뛰는 거라면 분명 많이 지쳐있던 게 아닐까. 무작정 제주현대미술관과 김창열도립미술관이 있는 저지문화예술인마을로 향했다. 그림 감상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지. 한 번 비추어 보자, 내 마음이 어떤지.
마을 어귀에 차를 두고 걸었다. 행선지를 처음부터 미술관이라고 정해두지 않았다. 딱히 보고 싶은 전시가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 따라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목적 없이 걸었다 생각했는데 익숙한 풍경이 나왔고 제주현대미술관의 후원에 들어서게 됐다. 1평 미술관이라는 생소한 공간을 찾아내다니. 계획되지 않은 의외의 발견, 뜻밖의 기쁨을 누려본 적이 얼마만이던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받고 단 한 평의 공간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작품을 관람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전시를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주관적 사유의 객관적 시각화'라는 작가의 내레이션이 귓가에 맴돌아서 소리 내어 서너 번을 읊조렸다. 오영종 작가에게 사진은 외부 세계를 담는 동시에, 작가의 생각과 존재 방식을 비추는 창이 된다. 사실적 묘사에 머물지 않고, 감정과 생각, 철학을 이미지 속에 반영하며 재구성한다. 그 결과 관객은 익숙한 현실을 그대로 보는 대신, 새로운 인식을 경험하게 된다.
관념적인 유화처럼 보이는 작품이 알고 보면 낡은 주택 외벽에 놓인 배관이었고, 함석지붕의 처마 끝이었단 사실이 작가의 의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나는 이미지가 아닌 관계를, 기록이 아닌 주관적 시선을 탐구했다."
"사진은 내게 세계의 재현보다는 세계에 대한 내 감각을 묻는 도구다."
그의 작품 설명에서 사진을 '글'로 바꾼다면 어떨까. 글쓰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를 통해 주변의 관계와 주관적 시선을 탐구하고, 세계에 대한 나의 감각을 묻곤 하니까.
아침을 삶은 계란으로 가볍게 때운 탓인지 정오가 되기 전부터 출출해졌다. 걸어서 닿는 거리에 백반 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차돌된장찌개에 찰솥밥으로 속을 든든히 채운 뒤 혼잣말로 물었다.
'벌써 1시가 다 되어간다. 자, 이제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싶니?'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으로 들어가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을 감상하며 생각을 비울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작품들은 마음의 여백을 마련하기 더없이 좋을 테지만, 내겐 당장 시간의 여백이 모자랐으므로.
산굼부리의 억새 군락을 연상케 하는 전시 포스터가 다시 제주현대미술관 1층으로 발길을 돌리게 했다. 제주도에 살게 되면 도저히 제주의 자연을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나 보다.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병풍처럼 둘러싼 섬이니 그런 걸까. 흔하디 흔한 한라산을 담은 풍경화라 하더라도 화가의 해석에 따라 매력이 제각각인 게 신기할 따름이다.
박광진 화백이 그려낸 한라산과 억새 군락지는 가을의 스산함보다는 작열하던 여름을 미련 없이 떠나보낸 성숙함에 가까웠다. 원 없이 푸르렀다가 요란스레 열매를 맺은 뒤로 맞이할 법한 고즈넉함이 사각 액자 밖을 넘어서 은은하게 배어났다. 억새끼리 바람에 몸을 부대끼며 빚어내는 소리를 시각화한 그림도 신선했다. 같은 장면을 사실주의 풍경화와 기하하적 추상화로 기법을 달리해 표현한 작품들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단지 시선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마주쳤을 뿐이었다. 아늑한 그림들 덕분에 싸늘한 바람에 얼얼했던 뺨과 손을 녹이고 적막했던 마음에 포근함을 채웠다.
사진과 그림은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느낀 바가 작가의 의도를 비켜났다 할지라도 감상에는 정답과 오답이 없으니 말이다. 작품을 어떤 인상으로 각인할지 감상의 주체인 내가 오롯이 선택할 수 있어서 좋다.
그동안 나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받아들이는 데 지쳐있었다. 시키는 대로만 고분고분 일 하느라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답답함은 참는다고 휘발되는 게 아니었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무작정 나선 길의 종착지가 미술관이었던 건 어찌보면 필연이었다.
없이 나 홀로 휴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