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당퐁당 100편 글쓰기 48화
무대 위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본 게 얼마만이었을까. 기억조차 까마득했다. 지금은 조용히 혼자 있길 좋아하지만 어릴 적엔 사람들 앞에 서는 걸 꺼려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소풍과 수학여행 때마다 장기자랑에 주자로 나섰던 걸 보면 말이다.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면 무슨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또렷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끝나고 받았던 박수갈채와 환호만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십 년 만에 서본 무대에서 왜 지나간 무대들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을까. 아마 용기가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모처럼 꺼내 신은 구두 속 발가락이 마디마디까지 떨리는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주문이든 간절했으니까.
'어릴 때도 떨었지만 해냈잖아. 이번에도 잘할 수 있어.'
긴장이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까 두려웠다. 대본을 반으로 접은 선이 너덜너덜 찢어질 때까지 연습했던 시간이 어이없이 날아갈까 봐.
점심시간마다 한적한 산책길을 걸으며 읊었다. 아이와 남편을 관객처럼 앞에 앉혀두고 시연해 보았다. 모니터링을 위해 녹화한 영상 속 내 표정과 목소리는 민망함에 손발이 오그라들어 차마 못 볼 지경이었지만 꾹 참고 봐야만 했다.
'겁 없이 친구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던 배짱아, 대체 어디로 사라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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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줄에 앉은 심사위원들, 그 뒤로 좌석을 메운 참가자들과 그들을 응원하러 와준 사람들.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집중됐다. 차렷 하고, 양손을 달걀 쥐듯이 말아 쥐고, '흠흠' 목을 가다듬고. 자, 이제 시작.
"난 왜 이렇게 못난이로 태어났을까?"
아기잠자리는 고추잠자리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았지요.
달맞이꽃이 아기잠자리에게 말했어요.
"옛날에 난 꽃 중에서 내가 제일 못난이인 줄 알았어. 그래서 아무도 없는 밤에 몰래 피기로 했지. 그런데 밤마다 달님과 곤충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얼마나 예쁜 꽃인 줄 알게 되었단다."
"달님! 달님! 여기 아주 귀여운 못난이 잠자리가 있어요. 달님의 은빛 사랑을 주세요."
"아기잠자리야, 먼저 네 모습 그대로 사랑해 봐. 둥그런 두 눈, 은빛 날개, 너만의 긴 꼬리.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스러운 네 모습이란다. 사랑해."
아기 잠자리는 두 날개를 활짝 펼쳤어요. 그리고 살짝 날기 시작했지요. 달빛 아래 춤추는 아기 잠자리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못난이 아기잠자리 (이규원)』
헬스장 벨트마사지기에 올라탄 듯이 덜덜덜덜 목울대가 진동했다. 하지만 그간 연습한 시간이 헛되지 않았는지 긴장감에 기억력을 몽땅 잡아먹히는 불상사는 없었다. 한 문장 정도 대본과 어긋나긴 했지만 다행히 티 나지 않은 거 같았다. 무사히 동화구연을 끝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길, 긴장이 풀려서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계단에서 고꾸라질까 겁이 났다.
곁에서 엎어지지 않도록 내 팔을 잡아주던 선생님과 아래에서 진행을 돕던 스태프들이 박수를 보냈다. 어떤 분은 "선생님, 정말 잘하시던데요?"라며 꽃다발 같은 칭찬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 제일 든든한 지원군, 남편과 아이는 여운이 긴 박수갈채와 환호로 조여있던 마음과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주었다.
그날 나는 감사하게도 '동상'이라 쓰인 상장과 메달을 품에 안고 돌아올 수 있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이번에는 당초 목표였던 <동화구연지도사> 자격증 시험이 남아 있었다. 교재 주요 내용에 형광펜으로 밑줄 긋고 요점노트를 정리해 본 게 얼마만이었을까. 기꺼이 주말마다 아이를 전담해 준 남편 덕분에 공부할 시간이 마련됐다. 이제 필요한 건 나의 의지와 노력뿐.
자발적으로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공부가 오랜만이라 그런가. 어찌나 딴짓이 고프던지. 괜히 화장대 서랍 안을 정리하고, 수시로 스마트폰을 열어보고. 시작이 반이라는데 예열하기까지 시간이 참 많이도 걸렸다. 나 자신과의 약속보다 한 번에 턱 하고 합격하길 바라는 남편과 아이의 기대가 더 눈치 보였다.
어찌 보면 신나기도 했다. 회사일 말고도 열중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게, 그리고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있단 사실이 스스로에 대한 긍지를 채워주었다. 12년간의 학창 시절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깨닫게 된 교훈이 있지 않은가. 공부에는 때가 있고 전념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야 두고두고 후회가 없다는 것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자라날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매진했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는지 <동화구연지도사>가 되는 필기와 실기 시험을 모두 통과하고 2급 자격증을 얻게 되었다. 이후로 나는 동화구연이 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게 됐을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1급 자격증과 <손유희지도사> 자격증을 함께 따야 교육 현장에 설 기회가 생길 터였다.
당시에는 아이가 어렸기 때문에 직장생활과 병행하며 또다시 자격증을 준비하기에는 무리였다. 게다가 회사에서 맡은 업무와 책임이 늘어나던 차라 체력과 정신적 여유가 부족했다. 한편으론 '이만하면 됐지, 이게 최선이야'라는 만족감이 그쯤에서 나를 멈춰 세웠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때 말고는 까무룩 잊고 지냈다. 동화구연과 목소리 연기에 대한 열망을. 아이가 혼자 힘으로 책 읽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더더욱 글을 소리 내어 읽는 나의 목소리를 들어볼 일이 없었다.
공저 육아에세이 『그럼에도, 사랑이었다』 출간 기념회에서 아이들을 위한 합동 동화구연을 준비한다고 들었을 때 조금은 반가웠다. 잊고 지냈던 그때의 열정에 다시 불을 지필 수 있을까. 준비하기에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과감히 손을 들었다. 대회에 나갈 때처럼, 시험을 준비하던 만큼, 오차 없이 준비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어서 부담을 덜었다.
프레드릭은 오래된 돌담 옆 헛간에 사는 들쥐이다. 프레드릭은 낭만적이고 따뜻한 시상을 가졌으며, 수줍음을 많이 탄다. 늦가을 무렵 다른 들쥐들은 겨우살이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프레드릭은 겨울이 다가와도 다른 들쥐들처럼 양식을 모으지 않고, 태양의 따뜻한 온기와 여름에 볼 수 있는 찬란한 색깔, 그리고 계절에 어울리는 낱말을 모으느라 바쁘다.
겨울이 되어 저장해 놓은 먹이가 떨어지자 들쥐들은 배가 고파 재잘댈 힘조차 잃어버린다. 그때 시인 프레드릭은 가을날 모아둔 자신의 양식을 꺼내 다른 들쥐들에게 나누어 준다. 쥐들은 프레드릭이 모아 놓은 햇살과 색깔과 아름다운 낱말에 추위와 배고픔을 잊고 행복해한다.
『프레드릭 (레오 리오니)』
오랜만에 마이크를 잡고 그림책 속 등장인물과 해설자가 되어보는 경험. 가성으로 어린 생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냈다가, 단전에 힘을 주어 굵은 수컷 생쥐의 푸념 섞인 소리도 냈다가. 차분한 음성으로 해설을 읊을 땐 정확한 발음과 속도에 신경 써야 했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아이들과 어른들의 시선이 『프레드릭』의 그림 영상이 나오는 모니터와 합동 구연하는 우리에게로 모아졌다. 잔뜩 힘이 들어간 떨림보다는 느긋한 설렘이 기분좋게 감돌았다. 잘 나오던 영상이 뚝 끊겨 버렸지만 "그냥 해요, 하던 대로 합시다." 우리는 연습한 대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프레드릭이 이야기를 마치자, 들쥐들은 박수를 치며 감탄했습니다.
짝짝짝 짝짝-
“우와아아.”
“정말 멋져!”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프레드릭은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한 다음, 수줍게 말했습니다.
“나도 알아.”
여기까지는 원작의 결말이다. 우리들의 마무리는 조금 달랐다. 주인공인 프레드릭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무대 뒤로 숨으려 한다. 그러다 쪼르르 다시 나와 관중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쳐본다.
너희 모두 시인이야!
한정된 시간 안에서 선택과 집중을 '잘' 해야 한다며 미뤄둔 일이 많다. 목소리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꿈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한 켠에 기약없이 낡아가던 꿈이 시나브로 꿈틀대기 시작한다. 작년에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올해는 공저 에세이 출간이라는 수확을 거두었다. 내년에는 무엇을 할까? 하고 싶은 일이 늘어나니 새해가 기대된다.
물론 또 시간과 체력이 열정을 따라주지 못한다며 낙심하고, 우울해하고, 무기력해지는 순간이 찾아올테지만, 끈을 꼭 붙잡고 놓지는 않으련다. 모처럼 기지개를 켠 꿈이 다시 잠들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