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여명이 창틈을 지나 방 안 깊숙이 스며듭니다. 의자를 당겨 앉자 나무 바닥이 낮은 숨을 내쉽니다. 그 작은 울림이 신호가 된 듯, 오래 가라앉아 있던 마음의 잔해들이 천천히 떠오릅니다.
아무리 걸어도 풍경의 색이 달라지지 않는 정체감, 진흙 속을 지나 듯 질척이는 무력감. 움직임이 길을 만들어줄 것이라 믿었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멈춰 선 자리에서 비로소 삶의 바닥을 마주하게 됩니다.
불 꺼진 방, 종이 한 장 놓여 있는 책상 앞.
정지된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향한 질문은 점점 예리해지고, 제자리라는 자각은 천천히 무게를 늘립니다. 마음이 어지러울수록 창문을 닫고, 사소한 소리들까지 차단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 고요는 고립이 아니라 신호입니다. 방향이 틀릴 때, 길이 새로 생기기 전에 맞닥뜨리는 경계선 같은 것. 삶은 언제나 큰 소리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눈이 포근히 쌓이듯, 자신의 존재를 느끼기 힘들 정도의 미세한 온도로 우리 곁에 내려앉습니다.
걸음을 멈춘 뒤에야 뒤따라오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숨 가쁘게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등이 돌아간 순간에야 온전한 형체로 다가옵니다. 안갯속을 더듬으며 나아가던 우리는, 사실 한 걸음 한 걸음이 ‘이유’를 찾기 위한 탐색이었음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발이 땅을 움켜쥐는 찰나, 삶은 말없이 문을 엽니다.
그 목소리는 과장되지 않습니다. 오래 신은 신발 뒤축의 마모된 감각, 문지방이 조금씩 닳아 사라진 자리처럼 조용하고 분명합니다. 설명 없이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어쩌면 진실은 언제나 늦게 도착하는지도 모릅니다.
식탁 맞은편, 주인이 사라진 빈 의자를 바라봅니다. 자리를 지키던 온기가 식고 난 뒤에서야, 그 사람이 차지하던 공간의 깊이를 깨닫습니다.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소리, 신문 넘기는 바스락 거림. 존재의 증거였던 작은 소리들은 사라지고, 대신 적막이 훨씬 큰 울림으로 남습니다. 부재는 때때로 존재보다 더 선명하게 자신의 자리를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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