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오늘도 카페에 멍하니 앉아있다. 오늘도 논문 작성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퇴근하고 카페에 노트북을 펴고 멍하니 앉아있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서른 살이 넘어 시작한 석사과정을 마무리하기 위한 논문 작성 때문이다. 4학기를 보내며 논문 주제도 정했고 연구계획서도 무리 없이 제출했으며, 졸업시험도 무난히 치뤘기 때문에 5학기를 마치고 무사히 졸업한다는 대범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인생은 역시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논문 작성을 위해 필요한 데이터 분양은 깜깜무소식, 그렇다고 지금 진행하는 주제를 바꾸자니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소위 MBTI 항목 중 마지막 글자가 대문자 P인 내 성격이 너무도 원망스럽다. 혹시 방학 때 좀 더 일찍 계획을 세워서 논문을 썼어야 했나, 아니면 그냥 논문 대체 졸업을 신청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를 자꾸 하게 된다.
논문 걱정 때문에 회사에서도 머리가 복잡하다. 사실 회사 일도 정신이 없는데 퇴근하고 석사과정 대학원생이라는 일명 ‘부캐’로 캐릭터를 갈아 끼운 다음에 바로 연구를 척척 진행하는게 나에게는 굉장히 어렵다. 때문에 뇌에 과부하가 걸려 회사 일, 논문, 일상이 멈춘 느낌이다. 사실 살면서 브레이크가 걸린 경험이 적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브레이크를 작동하면 안된다. 엑셀을 최대치로 올려 12월 초까지 달려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지만, 점점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내년에 갈 여행 계획을 세우며 리프레시를 핑계로 회피하고 있다. 너무 방대한 양의 생각이 뇌를 밀고 들어오니 정리가 되지 않아 글을 쓰고 있다. 힘들면 회피하는 내 성격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발현되고 있는 지금, 글을 써서라도 잡생각을 떨쳐보려고 한다.
우연히도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10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의 가사가 떠오른다. 워낙 유명한 가사이기도 하지만 '10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3단어로 이루어진 구절은뺨을 스피는 쌀쌀한 단풍냄새를 연상시킨다. 차갑고 쓸쓸하고 어둡지만 그 사이로 채도가 떨어진 은행잎이 적절히 깔려있는 집 앞 공원의 풍경이 머리에 떠오른다.
보통 가을은 9월, 10월, 11월이 떠오르는데(이제는 9월도 여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중 나에게 10월은 제일 색이 짙은 가을이다. 햇살은 적당히 따뜻하고 하늘은 높으며 단풍으로 얼룩진 풍경이 매일 아침 나를 맞이한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인 만큼 책도 눈에 쏙쏙 들어오고 문장 하나하나가 머리에 쏙쏙 흡수된다. 출근 길에 오늘 하루는 무슨 일 있던 간에 뭐든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10월이 끝나는 '10월의 마지막 밤'은 그 아쉬움이 다른 날에 비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래서 그런지 싱숭생숭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몇자 끄적인다. 나는 감정 표현을 어려워한다. 하지만 두서 없는 글로 몇 자 적어보니 생각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든다. 몇 년이 지난 후 우연히 이 글을 보았을 때 30대 초반 어느 가을 날, 뒤늦은 사춘기(?) 감성에 젖어 논문을 써야할 때 딴 글을 끄적이고 있는 나를 돌아보고 있지 않을까...그 때는 좀 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