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출신 직장인의 소회
"요즘 시대에 우리 사장은 대학을 왜 보는 거야. 최소한 경력직은 실력 증명했으면 뽑아야지"
같은 업종인 다른 회사보다 사람을 적게 운용하는 대신 연봉이 높은 편인 우리 회사는 매년 인력 부족 현상에 시달린다. 사실 경영진들은 인력이 충분하다 생각할 정도로 회사가 잘 돌아간다. 직원 한 명 한 명이 월급값 하려고 1.5인분 이상을 하다 보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보니 매년 직원들은 경영진들에게 사람을 더 뽑아달라고 아우성이다.
연봉이 높다는 소문이 파다하니 경력직 인기가 꽤 높다. 인지도가 높지 않아 신입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업계에선 거의 '신의 직장'인지라 경력직 경쟁률이 거의 신입 공채 경쟁률과 맞먹는다.
그런데도 이번 경력직 공채에서 사람을 한 명도 뽑지 않았다. 잘한다고 생각하는 일부를 면접까지 봤으나, 출신 대학이 경영진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문과가 날아다니던 지금 경영진들 시대에는 실제로 우리 회사에 SKY 출신만 있었다. 지금 부장 이상 직급은 모두 서울대거나 제일 낮은 대학이 고려대긴 하다. 지금은 회사를 떠난 직전 사장만 중경외시 대학이었다.
우리 직종에 대한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선배들 중에는 서성한도 많고, 90년대생 직원들 중에는 중경외시 출신도 꽤 있다. 조금 더 출신 대학에 대한 포용력이 점점 넓어지고는 있으나, 여전히 경영진들이 놓지 못하는 기대치가 있는 듯하다.
A 증권사 인사권자를 만났을 때도 '출신 대학이 여전히 중요하구나'를 또 한 번 느꼈다.
역대급 실적이 대대적으로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을 얘기하면서 "우리 회사에 이번에 좋은 인재들이 많이 왔다"며 자랑을 했는데, 그 근거가 지원자들의 출신 대학이었다. A 증권사는 애초에 SKY만 뽑는 걸로 유명한데, SKY 말고도 아이비리그대학 출신들이 많이 지원해서 더 기뻐했던 거 같다.
업계 탑인 B 증권사도 신입뿐만 아니라 경력직까지 SKY 위주로 뽑는 걸로 유명하다. 업계에서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재벌기업 계열사인 C 증권사마저 재벌 오너의 한마디에 몇 년 전부터 우선 SKY부터 뽑은 뒤 남은 자리를 나머지 대학 중에 잘하는 친구들로 뽑고 있다고 알려졌다. 연봉이 센 증권업계에서 비교적 연봉이 적어서 SKY 지원율이 적은 편인데, 오너가 지원자들 리스트에 대해 인사팀에 지적한 뒤로는 신입의 90%가 SKY라는 소문이다.
물론 실력으로 출신 대학을 만회하는 사람들도 많다. 임기제 사장이 있는 회사 가운데 대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사장을 맡은 시절에 지원했다면, 실력만으로 취업문을 뚫을 수 있다. 또는 회사를 한단계씩 차근차근 올리는 방법도 있다. 전 직장의 퀄리티가 대학 대신 그 사람을 증명할 수 있는 또하나의 잣대가 되곤 한다.
하지만 취업문을 뚫은 뒤에도 확실히 영업에 가까운 일을 할수록 출신 대학이 최소한의 나를 지켜주는, 또는 내가 실수를 연달아하더라도 나를 마지막까지 증명해 주는 라이선스 역할을 해주곤 한다는 걸 종종 느낀다. '그래도 서울대까지 나온 친구니까 뭔가 끗발이 있겠지' 하는 기대감 말이다.
필자는 문과라서 이과 쪽 업계는 잘 모르지만, 이과는 상대적으로 출신 대학이 덜 중요한 것 같다. 삼성전자와 같은 대기업에는 이과 직무의 경우 출신 대학이 엄청 다양하다고 한다. 전문직 라이선스도 시험만 통과하면 딸 수 있다.
하지만 여기도 승진 시에는 출신 대학이 중요한 요소라고 전해진다. 사람들이 입사하고 나서도 석사와 박사 같은 학벌에 매달리는 이유인 듯하다. 전문직의 경우도 채용할 때 학교가 좋은 친구들부터 뽑고 나머지 TO를 채운다고 한다. 전문직도 어떻게 보면 영업직이나 마찬가지니 어쩔 수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