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혹시 타임머신을 타본 적이 있는가

2025년 스물 다섯 살에 타임머신을 탄 사람

by 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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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혹시 타임머신을 타본 적이 있는가.

해가 진 후 일자로 늘어진 수그루의 가로등이 비춰주는 거리를 걷다 문득 내 세계가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너무나 갑작스러운 감각의 변화였기에 그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끝도

마찬가지이다.

할머니, 요새 내 일상은 할머니가 봤을 때는 좀 어떤거 같아?

1. 풍화

모든게 너무 빨리 변하고 눈길을 둘 틈도 없이 지나쳐가는 듯한 세상이다. 나는 어느 새부터인가 잠시 놓았었던 공부를 다시 하고있고 새롭게 배워나갈 지식들도, 도전해야할 목표들도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수면을 높여가는 밀물처럼 밀고 들어왔다. 그 한가운데에서 나는 피하지 않고 모든걸 받아들였다. 바람과 물이 시간을 타고 조금씩 바위를 깎아 나가는 것처럼 나도 자연스레 풍화되어 떨어져나가고 있었다.


2. 비움

약 3개월의 기간 동안 메달렸던 프로젝트의 끝을 맞아서 나는 마음이든 무엇인가를 비워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새로운 것을 담아내기에는 지금의 그릇은 그 표면이 거칠어져 있었고 조금 모자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4일 동안 제주도로 떠나 스쿠터를 타고 섬을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5일 동안 저녁을 먹은 후에는 항상 한강 앞 벤치에 앉아 떠내려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돌고 보고 뛰어보아도 여전히 비워지지 못했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었다. 오늘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끝내 나를 다시 만나볼 수 있었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에는 인턴을 가게되었기에 내 대학생활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내 지난 대학시절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동기와 함께 점심을 먹기로 약속을 잡았다. 근황과 소소한 얘기를 나눈 후에 따릉이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보관소에 도착한 후 잠금장치를 닫으려고 할 때였다. 핸드폰에서 재생하던 곡이 끝나고 새로운 곡으로 넘어가길 기대할 때 가끔 마주했던 그 목소리. 지칠줄 모르고 내개 들이닥치던 밀물을 마주할 때는 차마 집중하지 못했던 그 소리를, 그 순간에는 들을 수 있었다.


3. 당신 - 끝과 시작

내게 반갑게 안부 인사를 하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또렷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걸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작아지려는 내 몸을 붙잡아두려고 안간힘을 쓰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내 방으로 갈 때까지 간신히 버텼다. 어떻게든 작아지려는 몸과 그럴 수 없도록 붙잡아두려는 시간 사이의 일종의 팔씨름같았다. 이어폰을 꽂은 채로 녹음해놓았던 할머니와의 통화를 하나씩 재생했다. 그 당시에 내가 어떤 이유로 녹음을 했을까. 아마도 할머니와의 끝을 준비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끝'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었던게 분명하다. 녹음된 연도는 뜨문뜨문 했다. 16년도, 20년도, 21년도. 지금은 25년도이다.

내게 반갑게 인사해주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고 끝을 도저히 모르는 사람처럼 대답하는 나 자신의 목소리도 변함이 없었다. 평균 통화 시간은 1분을 채우지 않았다. 나는 질문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녀석처럼 대답했다. 당신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어도 나는 그 대화에 끼지 못한다. 질문을 더 던질 수 없다. 어쩌다 한번 그녀석이 짧게 던진 질문을 당신께서는 놓치지 않고 자신이 보낸 하루를 내게 들려주었다. 나는 '오늘은 뭐했냐'고 던진 두마디에 당신께서는 내게 일상을 공유해주었다. 내 이야기도 얘기해주었다면 더 기뻐하셨을텐데 그러지 않았다. 나는 녹음은 하면서도 '끝'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분명히 끝이 무엇인지 경험하고 알고있었음에도 내게 안부인사를 건네기 위해 걸어주는 전화에도 마지막이 있을 것임을, 내게 들려주는 할머니의 일상에도 마지막이 있을 것임을 나는 깊게 고민하기 싫었다. 인생의 유한함에 대해 지겹게 들었음에도, 끝에 대해서 모르지 않음에도 외면했었나 보다.

잘 알지 못한다. 내게 주어진 일과 내가 필요로하는 일과 내 소중한 사람과 함께 보내는 일 사이의 균형에 대해서. 이기적인 녀석인가 보다.

21년도가 마지막 통화 녹음인 것으로 보아 할머니의 치매 증상이 악화된게 22년도부터인거 같다. 최근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해지셨다. 손주가 아니라 낯선 청년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낼 때가 더 많아지셨다. 그러다 가끔 이름을 불러줄 때면 마음이 놓인다.


4. 검투사와 사상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나는 군에서 전역한 뒤로 달려왔다. 멈춘 적은 없다. 계속 달려오며 참고했고 앞으로 가야할 길에도 쓰일 내 마음 속 나침반이 바람에 그 방향을 상실한 지금에서야 멈추었다. 하프마라톤을 완주한 경험이 있지만, 숨을 참고 달리기에 2023년부터 2025년까지라는 유통기한 내지는 런통기한은 너무나 길다. 그 긴 여정으로 나를 밀어넣은 그 시발점은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2019년으로 가야한다.

나름 고등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했다. 돌아보면 공부보다는 생각과 성찰을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 거같다. 그당시에 나 스스로를 구성하는 두가지 개념이 있다고 믿었다. 검투사와 사상가. 사상가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고 검투사는 그 길을 현실로 만들어 개척해나간다. 유의어로 바꿔보자면 관찰자와 참여자이다. 고등학교 3년은 스스로 관찰자적인 삶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삶은 꽤 힘에 부쳤다. 당시 나는 내가 어느 가치를

추구해야할지 정했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고 행복은 무엇일까에 대해 답을 내렸었다. 그리고는 수능이 끝난 후에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이제는 관찰자보다는 행동하는 참여자의 삶을 살아보자고. 그 뒤로의 2020년은 모두가 잘 알다시피 코로나의 해였고 21년, 22년은 군대에 있었기에 일종의 중화를 위한 기간이었다. 쉬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전역을 한 뒤로 지금까지 달려온 것이다.

생각과 고민보다는 '일단 해봐'를 가장 첫번째 문장으로 가지고 살았다. 그렇게 2023년은 내가 좋아하는 건

뭔지 탐색하려고 애썼고 24년부터 개발자로서의 내 진로를 선택하고 공부했다.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 그리고 성장하는 시간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는 현대 사회가 가장 강조하는 가치이자 주장이다. 자신의 밸류를 높이고 성장하고 살아남는 것. 인정 받는 것. 사상가보다는 검투사와 가까이하며 지내다보니 생각 보다는 '일단

도전'을 외치며 나아가다 보니 위와 같은 사회의 슬로건은 내 나침반이 방향을 상실해간 만큼 정확히 그 자리를 메꾸며 방향의 무게를 맞춰주었다. 그렇게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현대사회의 가치가 혼합된 방향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그 방향이 가진 무게에서 내 나침반이 차지하는 지분이 조금도 없어진 지금,

나는 스스로와 세상을 관찰하기위해 다시 멈춘 것이다.


5. 끝과 시작

그렇게 멈춰선 내가 비워내기 위해서, 그리고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 섬을 한바퀴 돌고, 거리를 걷고, 한강을 보다가 결국 녹음해 두었던 음성 기록에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게된 것이다. 내가 세상과 마주하며 쌓아올렸던 껍질을 시간을 들여 벗겨낸 상태였기에 그 소리가 더 잘 들렸나보다.


다시 달려나가기 위해서는 나침반을 재설정 해두어야 한다.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고 올려야하는 시기이다.

그러기위해 멈춰섰나보다. 19년도 당시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나는 '여유', '강단' 두가지를 꼽았다. 강단은 챙겼어도 여유는 점점 사라져간다. 다른 가치 하나가 더 필요하다.

나는 '끝'에 대해서 알게되었다.. '시작'이 있었음도 말이다. '끝'과 '시작'이 이어져있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화의 종류. 할머니가 나를 인지하고 나눌 수 있는 대화. 그렇지 못한 채 나눌 수 있는 대화. 내가 할머니와

얘기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대화도 각 종류별로 끝이 있다. 관계의 끝이 있는 것처럼. 머리속으로는 알고있어도 마음으로는 외면하고 싶었기에, 결국은 알지못한 것과 다름없었던 시간의 유한함에 대해서. 그 끝에 대해서 다시는 잊고싶지 않고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소중한 어느 것이든 끝과 시작이 있음을.

살다 보면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기 위해 잊고 지나치는 것이 많다. '여유', '강단', '끝과 시작'. 이 세가지 만은 잊지 않고 또 달려보려고 한다.


6. 타임머신

가볍게 저녁을 먹고 다시 산책을 나갔다. 해가 진 후 일자로 늘어진 수 그루의 가로등이 비춰주는 거리를 거닐다 문득 내 세계가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너무나 갑작스러운 감각의 변화였기에 그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시선을 조금 위로 옮긴 나는 주황빛을 머금은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빛이 닿은 회색 계단을 위로 성큼 올라 두 짝대기처럼 서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보면 우측 엘리베이터가 나와 땅의 높이를 맞춰준다. 그곳에 발을 옮겨놓으면 어느새 아파트 곳곳에서 풍겨오는 찰진 저녁 냄새가

코를 넘어온다. 띵 소리와 함께 멈춰선 엘리베이터를 나와 좁은 아파트 복도를 지나치다 보면 그 중에서도 유독 정겨운 냄새가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문을 열면 어느새 낮아진 내 시선은 그 어느 곳보다 따스했고 즐겁고 편안했던 그 널찍한 공간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맨발을 마주놓는다.

나는 낮았던 시선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기에 지금의 내 고개를 낮추어 이전과는 완연히 달라진 보도블럭의

질감을 느끼며 모든 짐을 내려놓았다. 마치 서있는 그 길 한가운데가 그 널찍한 집이라고 착각한 것 마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