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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빈 Nov 15. 2024

봉준호가 사랑한 영화, 라쇼몽

라쇼몽 羅生門(나생문) , (1950 구로사와 아키라)

헤이안 시대의 폐허가 된 나생문 (독립문 같은 형태) 아래에서 농부와 승려가 넋을 잃고있고, 지나가던 행인이 비를 피해 들어와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모르겠어, 인간을 모르겠어'라고 되뇌이는 농부. 그와 승려는 일전에 있었던 '산적의 사무라이 살해사건'에 목격자로서 재판에 참여한 경위를 말해준다.

악명높은 산적과 살해당한 사무라이, 겁탈당한 그의 아내. 산적이 해변가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어 자세한 사건이 밝혀지고 재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한 사건을 두고 농부/ 산적 / 사무라이의 아내 / 사무라이 (영매를 통해 빙의되어 진술)

4인의 증언이 반복되나 각자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각자의 진술에는 모두 거짓이 섞여있는데 이는 저마다 숨기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덮는 방향으로 각색돼있거나 생략되어있다.


- 각자의 진술 요약

산적: 본인은 낙마한 것일 뿐이며 전투에서 당당히 이겼고, 사무라이의 아내 또한 진실된 마음으로 혼인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여자: 그녀는 강제로 겁탈당한 뒤 지조를 위해 자결하려 하였으나 그마저 저지당하고 떳떳한 여자로 살아갈 수 없으니 사무라이와 산적이 결투하여 승자가 자신을 데려가기로 했으나 사무라이는 죽고 산적은 본인을 버리고 떠났다고 한다.

사무라이 혼령: 자신은 함정에 빠져 포박당하여 제대로 된 결투를 할 수 없었고 아내마저 산적의 편에 서 자신을 살해했다고 얘기한다.

농부: 어쩌다 그들을 봤다.



무엇이 완전한 진실인지는 알기 힘드나, 농부가 이야기 끝에 고백하기를

자신이 관에서 진술했던 것과는 다르게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 어느것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진실을 알고있음에도 농부가 바르게 고하지 않았던 것은 그 사건 속에 자신의 추함과 범죄도 섞여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사무라이의 아내가 놓친 은장도를 농부는 숨어서 지켜보다가 훔쳐서 생활비로 사용했던 이유였다.


즉, 진실을 가장 가깝게 알고있는 농부의 입장에서는 자신도 비록 거짓을 고했지만

다른 모든 증언들 조차 각자의 체면을 위해 거짓 진술됨을 보고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고 느껴 충격에 빠져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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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있었던 일

사무라이는 포박당했고, 사무라이의 아내는 겁탈 당했다. 산적이 그 자리를 떠나려 하자 사무라이의 아내는 산적과 사무라이 모두에게 윽박지르며 그러고도 둘 다 남자라고 할 수 있냐며 제대로 결투한 뒤 자신을 데려가라고 소리 친다.

그녀의 기세에 눌려 산적 또한 얼떨결에 결투에 임하게 되고 포박이 풀린 사무라이와 산적은 여자의 눈치를 보며 서로를 죽이기 위해 겁에 질린 채 싸우게 된다.

이 싸움은 제대로 된 검투가 아닌 볼품 없는 생존의 투쟁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산적은 상처를 입고 사무라이는 죽게 된다.

그러나 광인에 가깝던 산적보다 더욱 광기를 품은 여자의 모습에 겁이 질려 산적은 달아나게 되고 아내 또한 자리를 뜨게 된다.

그 틈에 농부는 그녀의 은장도를 훔쳐 달아난 것이고 산적은 상처가 곪아 이내 쓰러져 발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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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들은 행인은 결국 모두가 위선자일 뿐이라며 농부까지 비난한다. 승려 또한 농부가 끝내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을 한데에 실망하며 자신은 더 이상 불교의 가르침대로 인간을 믿을 수 없게 됐다며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반응하는 행인이 산적에 버금가게 양아치처럼 행동하며 농부에게 비아냥 거리는 것이나 얼굴을 들이미는 것도 굉장히 꼴보기 싫다.


그때 나선문 구석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그 곳에는 보자기에 쌓여진 갓난아기와 값나가는 물건이 함께 있었다.

행인은 얼른 값나가는 물건만을 챙기며 농부와 승려를 위협하고, 자신에게 향하는 도덕적 비난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채 이런 난세에는 이게 세상사 이치라며 비를 맞으며 떠난다. 그는 부끄러움이 없다.


이어 농부가 아이를 챙기려 하자 승려는 그를 막아서며 무슨 짓이냐 하고, 농부는 슬픈 눈을 지으며 자신이 거두어 키우는 자식이 5명이라 6명이 되어도 다를바 없다고 한다.

승려는 즉시 자신이 부끄러운 의심을 했다고 사과하며 어쩌면 이제 다시 인간을 믿을지도 모르겠다며 떠나는 농부를 바라보며 영화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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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기억의 주관성과 왜곡을 통해 인간이 가지는 이기심과 각자의 자존심에 따른 위선적 연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비밀스러운 현실 속에서는 그들이 지키려는 자신의 이미지와는 반대되게 개인은 추악하거나 우악스럽고 볼품없으며 빈곤한 모습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순간을 맞이했을 때, 자신의 과오를 속죄하고 깨달음을 얻어 성인이 되는것이 불교적 성장이라면

인간 모두가 그 성장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그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부처럼 은장도를 훔쳐 파는 죄가 있음에도 그 돈으로 아이들을 거둬 키우는 삶에게는 옳곧음이라는 잣대를 순결하게 들이댈 수 만은 없다.

성인으로 거듭나진 못하더라도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총량적으로 보았을때 선한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복잡하고 양면적인 삶에서 승려는 일반적인 인간의 삶의 모습을 이해한 것이고 그 속에서 숭고함과 희망을 본다.


보통의 삶이란 부끄러움을 외면할 때도 있는 것이고

외면에 익숙해져 갈수록 선의 길이 닫혀간다.

과오는 사라지지 않으나 꾸준히 악해지는 것은 선택일 뿐이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속죄해가며 나아지려 애쓰는 것이 인간의 도리일 것이다.


라쇼몽, 나생문은 그물처럼 퍼져있는 생의 모습들을 상징한다.


+ 영화 촬영 기법과 연기

흑백 영화임에도 액션의 속도감, 장면의 레이아웃 밸런스가 멋지다.

관아에서 재판이 이뤄질때 각 증인들을 정면에서 찍으며 뒤에 농부와 승려가 가만히 앉아있는 장면들은 잘 정리되어있고 귀엽기도 하다.

산 속에서 뛰어다니며 사건을 떠올리는 회상 장면들은 역동적이고 극적이다.

라쇼몽 아래에서 고뇌하는 인물들과 행인의 대립은 연극적으로 배치된다. (라쇼몽의 여러 위치에서 앞 뒤로 앉아있으며 미쟝셴 위주로 배치)

소시민적인 행색과 표정의 농부/ 광인같이 과장되고 생명력 넘치는 산적 (노홍철이 이 사람을 레퍼런스했나?) / 고상한 척하지만 가장 기괴했던 여자/ 백면서생같은 승려 / 10하남자 사무라이 / 안하무인의 삼류양아치 행인

모든 연기가 인상적이고 각 인물의 역할을 정확히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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