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세계대전 한가운데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1929년 프랑스 철학교수 시험에 각각 수석과 차석으로 합격한다. 서로의 지성과 매력에 끌인 둘은 향후 50년간 그들의 관계를 규정한 파격적인 계약결혼으로 프랑스와 유럽의 지성계를 뒤흔든다. 아래는 계약 결혼의 3가지 규약이다.
첫째,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서로 허락한다. 둘째,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다. 섯째, 경제적으로 서로 독립한다.
이 제안을 먼저 제시한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에 기반한 철학자이자 소설가로 알베르 까뮈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자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의 인생이란 B와 D사이의 C로 정의한다. 삶은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이란 얘기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타자와 내가 모두 주체성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맺는 관계로, 사랑의 이상이란 그냥 여기에 있는 내가 사랑을 매개로 타자에게 꼭 필요한 존재로 여겨지는 상태라고 한다.
50여 년간 계약결혼을 이어가며 그와 함께 했던 배우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최초의 페미니즘, 실존주의의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 작가였다. 철학적인 글쓰기로 현대의 페미니즘을 성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낙태죄 폐지, 제2의 성으로 유명하며 장폴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주제로 사르트르와 논쟁을 벌이면서 그의 주장에 반박하려 했지만 결코 사르트르를 이길 수 없었다. 사르트르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보다 항상 더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를 회상 아며 보부아르는 일기장에 ‘사르트르는 지식의 훌륭한 반려자다’라고 적는다. 사르트르 역시 당시의 보부아르를 자신의 완벽한 대화 상대자로 생각했으며 보부아르의 지적, 관능적 매력에 빠진다. 머리가 아주 좋고 푸른 눈을 지닌 지적인 보부아르는 1970년대에는 여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낙태와 피임 자유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권익 보호, 가정폭력 근절에 힘쓰다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1986년 그녀의 장례식에서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여! 그대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전부 보부아르 덕택이다."라는 유명한 조사가 있었다.
이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의 양대 지성 사르트르와 보부와 르가 이루려 하고 설파하려고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계약결혼을 통해 주체와 주체의 결합으로 남녀의 관계를 의사소통의 이상 관계로 승화시키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궁극의 목표로 삶으려고 했던 것은 너와 내가 하나인 ‘우리’였던 것 같다. 실제로 그들은 서로를 ‘나의 작은 절대’, ‘나보다 더 확실한 당신’, 당신이 곧 나예요!’라는 표현들을 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둘을 끈끈하게 잇는 강한 공통분모를 확인한다. 그것은 말, 즉 ‘대화’와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열정이 50년 넘게 그토록 오래간 것은 한 일화로도 증명된다. 한 번은 보부아르가 윤리의 문제에 대한 자신 생각을 펼쳐 보인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 강한 비판을 받는다. 보부아르는 세 시간에 걸쳐 완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변호했으나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누구한테 지식이 뒤진다고 느낀 것이다. 이처럼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지성과 지식에 강하게 끌리며 자신과 그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서로의 엄청난 지적인 대화와, 사유와 토론, 서로의 문학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이었다. 이처럼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만나면서 사르트르가 자신의 삶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계약결혼을 통해 이상으로 삼은 목표는 의사소통의 이상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즉, 주체와 주체가 만나 내가 너고 너는 내가 되는 ‘우리’로 정립되는 관계.
보부아르는 샤르트르와 보낸 그 긴 시간이 몹시도 아름다웠다고 아래의 말처럼 회상했다. “사르트르의 죽음은 우리를 갈라놓았다. 내가 죽어도 우리는 재결합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뭐라고 해도 별 수 없다. 우리의 삶의 그토록 오랫동안 조화롭게 하나였다는 사실이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두 사람이 하나인 이 두 사람은 한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고서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가 없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대화가 서로 유려하여 재밌고 흥미롭고 편하며, 때론 긴장감 있는 지적 자극을 주는 솔직하고 진실된 영혼의 단짝(Soulmate)이 우연히 운명적으로 우리에게 스며온다.
감정과 마음이 생기면 뇌와 심장의 신호를 받아들여 선택하는 것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이야기했던 주체적인 나의 선택인 실존주의적 삶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