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학은 잠시 머물 조용한 쉼터를 찾는다.
챕터 2. 서툰 마음
-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의존하며 캄캄한 시야에 익숙해질 참에, 뒤에서 강한 자연광이 비추며 주변이 갑자기 환해졌다. 옅은 무지갯빛은 파동을 일으키듯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주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광경을 본 승학은 본능적으로 '와'를 내뱉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아이고오~이쁘다아!"
"신기하네, 그건 무슨 능력이야?"
"난 존재 자체로도 빛나!"
"... 그래"
여자애의 능력은 어휘구사를 다 사용해도 표현하기 턱없이 모자랐다. 감탄사를 멈추곤 여자애를 잠시 바라봤다. 여자애의 존재는 그 어떤 형용사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을 발견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곧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찰칵 찍히는 소리가 들렸다.
"빛 좀 줄여줄래?"
"그런 거 못해!"
"그럼 가리기라도 하자, 내 옷 빌려줄게."
승학은 젖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체육복 바지와 티셔츠를 꺼내곤 여자애에게 건넸다. 바닷물에 젖어 거적때기가 된 꼴이 주기 민망했지만 본인 딴에는 최선의 대처였다.
"불편해! 불편해!"
"사람이 되려면 입어야 해"
승학은 낑낑거리며 윗도리를 겨우 끼워 넣었다. 왼쪽 팔까지 집어넣는 데 성공하자, 여자애는 두 다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 나머진 스스로 하자."
여자애는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더니 이내 군더더기 없이 남은 옷을 입었다. 뒤돌아 있던 승학을 툭, 툭 치곤 뭔가가 완성됐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승학은 가방에서 낡은 슬리퍼를 바닥에 놓곤 여자애의 발등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리고 한쪽 발씩 천천히 끼워 넣었다. 여자애는 처음 신는 신발 감촉에 놀랐는지 버둥거렸다.
"아아-! 바닥이 이상해!"
그 모습을 본 승학은 입을 가리곤 작게 웃었다.
그리곤 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이 주말이었던 터라 기숙사 퇴실 일정과 겹쳤고 마침 집은 걸어서 2시간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돈을 받아낼 수 있었다. 휴대폰 너머로 건성건성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사실상 주말도 기숙사 신청을 하든 지금 집에 돌아가든 그들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승학은 쓴 걸 삼킨 듯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애는 승학에게 한껏 웃어 보였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디로 갈 거야?"
”안전하게 밤샘할 곳“
승학은 제집 가듯 익숙하게 움직였다. 익숙한 길, 한두 번이 아닌듯한 대처였다.
“그나저나 사람은 일정시간마다 밥을 먹던데, 너 배 안 고프니?”
“너 고프면 먹자”
“난 너랑 같지 않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어”
“그럼.. 그냥 가는 게..”
“그래도 맛은 느낄 수 있지! 그러니까 어디라도 데려가줄래?”
여자애가 본 승학은 본인보다 작고 마른 체형에 힘도 없는 어린 여자아이와 같았다. 눈앞에 나약한 어린아이가 저를 더 챙겨주긴커녕 본인을 배려하는 듯한 이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애는 승학의 손을 이끌고 무작정 앞으로 향했다. 그가 어딜 가냐고 묻자, 본인의 이끌림에 따라간다고 대답한다.
“저기 반짝이는 상자는 뭐야?”
“간판이야. 편의점이네, 가자.”
“우와, 멋있다!”
여자애는 계속 먼발치에서 이상한 얼굴로 감탄했다. 같이 가겠냐고 했지만 어째선지 바깥 벤치에 앉아 기다리겠다고 했다. 승학은 자판기 우유라고 적힌 컵 두 개를 들고 여자애와 마주 앉았다. 컵 하나를 여자애에게 건네며 물었다.
“신발 신는 게 아직 적응이 안 됐어? 그래도 발이 다치니까.. 불편하면 양말이라도 사줄게”
여자애는 풋, 하고 손으로 하관을 가리며 웃더니, 우유 한 모금을 들이켜곤 승학에게 내뿜었다.
“아, 미안.. 엄청 뜨겁네 이거..”
여자애는 후다닥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티슈 한 뭉텅이를 가져와, 승학의 얼굴에 문댔다.
“혹시 내 모습 때문에 너까지 피해 볼까 봐..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기와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을 경계하잖아? 그래서 그랬는데.. 이미 너한테 피해를 줬구나”
“괜찮으븝브으....그만해.”
“흐흐.. 이렇게 뜨거운 건 처음 먹어봤어. 자, 숟가락이지 이거?”
눈앞에 내민 건 빨대였다. 갖고 온 정성을 봐서라도 뜨거움을 견디고 한 모금 빨아들였다. 다음 순간,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잠깐, 잠깐만..”
급하게 방향을 틀어 본능적으로 입 주변을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뱃속에 모든 장기들이 미친 듯이 뒤틀리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바다 한가운데 빠진 사람이 이상하리만치 멀쩡하게 걸어 다니긴 했다. 여자애는 입으로 헉, 소리를 내더니 이내 떨리는 손으로 승학의 몸을 군데군데 집으며 상태를 확인했다.
“으읍...”
“어디가 아파! 여기? 여기? 여기? 여기?!”
"건들지 마..!"
"어딘지 말해줘! 내가 고칠 수 있어, 날 믿어!"
“... 배가 아파.”
동정 어린 눈빛으로 여자애는 등을 쓰다듬더니, 승학의 얼굴 앞 공손히 두 손을 내밀었다.
“자, 일단 여기다 토해!”
“......(할 수 있겠냐)”
“조금만 있어봐..! 내가 금방 고쳐줄게!”
마법이라도 쓰려는 건지 여자애는 승학의 몸을 비틀어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그리곤 고개를 살짝, 뒤로 빼더니 이내 승학의 이마로 돌진했다.
빡!
소리와 함께 반동으로 승학의 몸이 뒤로 쏠린다.
“아악..! 아아..”
승학은 고통을 호소하며 여자애를 바라봤다. 여자애는 방황하는 손과 흔들리는 눈동자로 마찬가지로 승학을 바라봤다.
"왜 네가 놀라는 거야.."
“.. 아아!, 내 긍정 에너지를 네 몸속에 들여보냈어! 이제 하나도 안 아프지?”
여자애의 말대로 메스꺼움이 멈추고 눈앞이 선명해졌다. 순간이지만 머리가 상쾌해진 것 같기도 하다. 여자애는 자신만만한 표정과 몸짓과 말투로 말했다.
“ 사람들은 이걸 물리치료라고 불러!”
“전혀 아니야..”
어설프고 소박한 식사를 마치고 둘은 ‘아이앤유 무인텔’이라고 적힌 곳으로 들어갔다. 승학은 들어가기 전 몇 번, 몇십 번 ’ 괜찮겠어?‘라고 물었다. 그럼 여자애는 한결같이 같은 대답을 했다. ’빨리 편하게 맨발로 자고 싶다!‘
“괜찮다니깐, 방 두 개는 가격이 부담스럽잖아, 그 정도는 알아!”
“그래도..”
“ 나랑 같이 있기 싫은 거야?”
“그런..! 그렇지는 않아..”
“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까 괜찮아, 괜찮아!”
여자애는 아무 일 없을 거라는 듯, 자신만만하게 승학의 등을 톡, 톡 쳤다. 하지만 승학의 단전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불안감은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승학은 몇 번이고 숙박버튼을 눌렀다가 취소했다가를 반복했다. 시간이 꽤 지난 건지 어느새 뒤에 사람 한둘이 줄을 섰다. 승학은 이젠 모르겠다는 식으로 대실버튼을 세게 눌렀다. 두 남녀의 핸드폰 타자 속도가 빠르게 늘어났다. 타닥, 타닥 고개를 왔다 갔다, 서로 눈을 마주친 듯, 메신저로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남자 쪽이 작게 중얼거렸다.
"... 세상에, 미성년자 둘이서"
사고가 멈추고 호흡이 가빨라진다. 바닥에 떨어진 체크카드를 여자애가 주워 승학의 손에 꼭 쥐어주지 않았더라면, 승학은 그 자리에서 영영 굳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여자 쪽이 마지막에 '신고할까?'라는 말이 희미하게 들린 듯하다. 비슷한 문맥이었는지, 머릿속에서 재창조한 것인지 알 수 없기에 더욱 불안했다.
무인 결제기 화면에 대실 안내 내용이 나오고, 방위치 까지 나오자마자 여자애가 승학의 손을 잡고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여자애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작게 속삭였다.
“....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나가는 척 하자. 그러고 저 커플이 방으로 들어가고 나면 그때 우리도 들어가자, 알았지?”
꽤나 위험한 상황이었다. 큰 범죄를 지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쁘고, 온몸이 경직될 것 같이 긴장이 되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미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둘 다 알고 있을 터였는데.
여자애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 손이 순식간에 모든 걸 안심되게 해 주었고, 강인하게 행동하는 태도가 모든 걸 두렵지 않게 해 주었다.
“이제야 숨통이 트이네, 그렇지? 한 1분만 있다가 들어가자.”
“응, 고마워”
“아니, 이쪽이야말로”
승학은 오래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털썩-
그리고 쓰러졌다.
“어라..?”
-
정신은 말짱한데 눈앞이 아득하게 흐려서 숨을 깊게 들이쉴 때마다 불쾌한 여운이 남았다. 얼굴 피부에 닿는 공기가 미친 듯이 뜨겁고 무거웠다. 차갑고 떨리는 손으로 이마와 볼에 갖다 대며 조금이라도 긴장을 감추려 애썼다. 일순의 안정감에 횟수가 점점 늘어날 때, 쏟아 붙이는듯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깊게 울렸다.
“집중하고 있냐고. 아까부터 말이 없어, *나 답답하게”
작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소름이 끼치는 시선이, 가슴이 으스러질 정도로 크나큰 공포로 다가왔다.
“너 이번에 대회 상금도 받았잖아, 이 정도 돈도 주기 아깝다 이거야? 내가 이때까지 잘해준 건 뭐야 그럼?”
“야 지금 두 명만 더 채우면 돼. 아님 그냥 그 사람들한테 팔래? 애새*들 졸아가지고 지금 거의 다 튀었어”
“에이씨, 다 죽자 그냥”
눈앞에서 부당한 요구를 하는 두 명 뒤에는 또 다른 가해자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몇 마디 나누지 못하고 놓친 듯 보였다. 눈이 마주친 눈치 빠른 아이들은 교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한울은 담임이 이 둘을 붙여줬을 때부터 점 찍힌 경우기 때문에, 반항 한번 못해보고 하나는 잃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상금 부모님 계좌에 있어, 지금은 얼마 없어”
“.. 그게 안되면 인증번호라도 보내. 내가 어디 불법사이트에 가입이라도 한다했냐?”
“야 닥쳐봐, 이 자리에서 단톡방에 두 명만 초대하면 앞으로 이런 거 안 시킬게. 괜찮지?”
눈앞에 들이댄 오픈채팅방 화면이 점점 초점이 맞으며 선명하게 나타난다. 폭력적인 욕설, 음담패설, 생전 처음 보는 저속한 말투들 하나하나가 아득히 정신을 나가게 한다.
“.. 안 할래”
“.. 앞으로 쉬는 시간에도 말 걸어줄게.”
마치 배려라도 하는 것 마냥, 양쪽 입고리를 올려 교활하게 웃었다. 억지로 눈을 피하자, 한쪽 손을 치켜들어 그대로 승학의 양쪽 볼을 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아, 맞다. 넌 단톡방에 초대할 친구도 없지? 나 슬슬 야마 돌려고 해"
“야, 조용히 해 애들 보잖아 씨. 저기 가게 뒤에 가서 패든가”
“아니 야, 안 팰 테니까 내일 꼭 나와라 진짜? 넌 항상 모둠 수행일 때만 째더라.”
지금 하는 짓과 모순되게 이 두 녀석은 학교서 행실이 좋았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대들기는커녕 꼬박꼬박 대답도 잘 해댔고,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교실에 풍기는 담배 냄새를 덮으려 옆자리 친구한테 간식을 주며 방향제를 빌리는 짓도, 교실 쓰레기통을 치우며 소주캔을 대놓고 처리하는 짓도, 누구 하나 문제 삼지 않았다. 그들의 양면적인 태도가 이상했다. 선생님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장 고깝게 보이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승학이었다.
“이것만 하고 쨀 거면 그냥 알바를 해라;;너 뭐 용돈 안 받음? 여자 친구가 또 명품 사달래?”
“아니, 평범한 고딩이 돈이 어딨다고 당당하게 그런 걸 요구하냐. *소 부모 뒀다고 일부로 엿 맥이는 건가? ”
“ㅇㅇ, 님 제대로 호구 잡힌 듯, 저번엔 지인한테 담배 구해달라고 하더니ㅋㅋ나중엔 돈까지 빌릴걸?”
“아 또 디엠 왔어. 개빡치네 진짜 얼굴만 아녔음 샌드백이었을 *이”
“아 조용히 말해 좀. 승학아, 이 *끼 목소리 개별로지? “
“응 꺼져, 아무튼 내일 꼭 나와라. 할 짓 없다고 쥐어패는 2,3학년 *끼들 보다 선생 앞에서 챙겨주는 내가 낫잖아?”
위선적인 미소, 말끝이 점점 멀어진다. 고통을 삼키고 알량한 용기로 내디딘 발걸음의 의미가 전부 다 사라진다. 교실뿐만 아니라 딛고 있는 모든 공간들이 미친 듯이 불쾌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 녀석들이 가고 나면 또다시 지옥이 기다리고 또다시 도망가고, 또다시 붙잡히고, 또다시 발버둥 치고, 또다시 후회할지도 모른다. 제일 싫은 건 이 모든 역겨운 상황을 견디지 못하면서도 극단적 선택 앞에서 겁이 나 망설여지는 자기 자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