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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가을, 흐린 날의 선물

연재)늦어도 괜찮아. 50대, 파리 유학생이 되다

by Selly 정

뱅산느 공원에서 만난 시간의 흔적들

뱅산느 공원에 들어서니 가을이 한창이었다. 나무들은 제각각 다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어떤 나무는 여전히 짙은 녹색을 고집하고, 어떤 나무는 노란빛으로, 또 어떤 나무는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시간이 나무마다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넓은 잔디밭이 나타났다. 수십 마리의 기러기들이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고 있었다. 회색빛 몸체에 긴 목을 가진 이들은 여유로웠다. 사람들이 지나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을 해가 나무 사이로 스며들어 금빛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낙엽들이 바닥에 쌓여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렸다.

호수 쪽으로 향했다. 물가에는 여러 종류의 새들이 모여 있었다. 백조들이 우아하게 유영하고, 오리들이 호숫가를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한쪽 벤치에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무언가 조용히 말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조를 가리켰다. 불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이런 대화였을 것이다.

"매년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있구나." "그래도 매번 새로워." "우리도 그렇고."

그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편안함이 느껴졌다. 호수에 비친 가을 나무들과 함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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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하늘 아래 에펠탑의 다른 얼굴

오후에 에펠탑으로 향했다.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덮여 있었고, 탑의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맑은 날의 화려함은 없었지만, 오히려 더 서정적이었다. 관광객들은 흐린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센강에서는 유람선이 지나갔다. 배 위의 사람들이 창밖으로 파리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펠탑 근처에서 한 젊은 커플이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흐린 날씨에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을 것 같았다.

"비가 올 것 같은데..." "괜찮아, 오늘의 파리도 특별해." "우리만의 파리네."

흐린 하늘 아래서도 파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에펠탑 주변 공원의 벤치들은 비어 있었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더 깊은 감동이 느껴졌다. 잔디는 여전히 푸르렀고, 나무들은 조용히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리를 건널 때 본 파리의 모습은 또 달랐다. 오스만 건축의 건물들이 센강 너머로 펼쳐져 있었고, 유람선과 하우스보트들이 강 위에 점점이 떠 있었다. 흐린 날의 파리는 화려함보다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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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괜찮다는 것의 진짜 의미

뱅산느 공원의 기러기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각자의 속도로 풀을 뜯고, 각자의 자리에서 쉬었다. 50대에 파리에 온 나와 비슷했다. 남들보다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들처럼 내 속도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

호숫가의 노부부는 더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들이 함께 앉아 바라본 호수의 백조들, 그 평화로운 순간들. 사랑도, 꿈도, 도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언제 시작하든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의 진정성이었다.

에펠탑의 흐린 날 모습이 오히려 더 인상 깊었던 것처럼, 인생의 흐린 날들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50대에 시작한 유학도 맑은 날의 화려함은 없을지 모르지만, 흐린 날의 깊이가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되었다.

파리의 가을이 가르쳐준 것은 단순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사실은 가장 완벽한 타이밍일 수 있다는 것. 뱅산느 공원의 나무들이 제각각 다른 속도로 단풍이 드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각자의 계절이 있다는 것.

흐린 날의 에펠탑이 맑은 날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듯이, 늦게 시작한 꿈도 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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