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한 번 잊어버렸을 뿐인데
파리의 9월 끝자락은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다.
아침엔 오리털 파카를 꺼내 입게 만들더니, 오후엔 훌훌 벗어던지고 가벼운 재킷으로 갈아입게 만드는 변덕쟁이처럼, 11도의 차가운 아침이 오후엔 17도를 넘나들며 따스함으로 몸을 감싼다.
"역시 너무 두껍게 입었어."
수업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재킷을 갈아입었다. 평소처럼 즐겁게 수업을 마치고, 밤 9시가 훌쩍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첫 번째 현관문. 디지털 코드를 누르니 딸깍, 문이 열렸다.
두 번째 현관문. 가방을 뒤적이며 열쇠를 찾는 순간—
"어...? 어머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열쇠가 없다.
파리의 아파트는 대부분 이중 현관문 구조다. 건물 입구를 통과해도, 자기 집 문을 열려면 또 다른 열쇠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그 소중한 열쇠가 내 손에 없다.
딸과 남편은 한국. 여분의 열쇠는 집 안.
하늘이 까맣게 느껴졌다. 주저앉고 싶었다.
'어떻게 들어가지? 누구한테 도움을 청하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집주인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전화를 걸었다. 시계는 벌써 밤 9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혹시 열쇠 가지고 계시나요? 제가 열쇠를 잃어버려서..."
"아, 안됐네요. 하지만 저는 열쇠가 없어요. 두 개밖에 없는데, 당신이 다 가지고 있잖아요."
그의 말은 마치 벼랑 끝에 선 나를 밀어버리는 한마디였다. 절망이 검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세상에, 집주인이 열쇠가 없다니!'
예전 집주인은 마법사의 만능키처럼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깜박하고 열쇠를 놓고 나갔을 때도, 그는 구세주처럼 휙 달려와서 문을 열어주곤 했었는데. 하지만 이 집은 달랐다. 설령 그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 해도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30분 거리를 달려올 리 없었다.
집주인은 친절하게도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열쇠 수리공 협회 사이트가 있어요. 거기 주소 입력하면 가까운 업체에서 연락 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현실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오늘 밤 여기서 잘 수는 없다. 일단 호텔을 알아봐야 한다.
한국은 새벽 4시 40분. 세상이 가장 고요한 시간.
떨리는 손으로 딸에게 카톡을 걸었다. 마치 망망대해에 떠 있는 표류자가 구조 신호를 보내듯. 다행히 딸은 일찍 깨어 있었다.
"엄마, 무슨 일이야?"
"열쇠를... 잃어버렸어..."
딸은 바로 움직였다. 마치 숙련된 항해사처럼, 놀라운 속도로 가까운 호텔을 검색하고, 협회 사이트에 접속해 정보를 입력했다. 몇 분 후, 한 업체에서 전화가 왔다.
"불르르르르—"
빠른 프랑스어가 기관총처럼 쏟아졌다. 귓가를 스치는 말들은 안개 속 그림자처럼 흐릿했다. 솔직히 70% 이상을 못 알아들었다. 그래도 나는 마치 난파선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내 상황을 설명했다.
"Je... j'ai perdu ma clé... 130유로 possible?"
처음 제시한 가격은 160유로였다.
'세상에, 열쇠 한 번 여는데 160유로라니!'
그 숫자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을 찔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딸이 미리 조사한 최저가는 130유로. 나는 다시 한 번 사정사정해서 130유로로 합의했다.
"내일 오전 11시에 와주세요."
중간중간 그가 뭔가를 물었지만,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지금 어디 있냐고, 밖이냐고, 아파트 안이냐고 물었다.
'당연히 밖에 있으니까 당신을 부르는 거 아니에요?'
속으로만 생각하며 엉뚱한 대답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동문서답 같은 대화를 나눈 후, 내일 오전 11시 약속을 잡았다.
딸이 찾아준 호텔은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의 3성급 호텔.
"더블룸 하나요. 125유로입니다. 보증금 100유로 추가요."
총 225유로.
호텔비 125유로 + 열쇠 수리비 130유로 = 255유로.
하룻밤 사이에 30만 원 넘게 날아갔다.
호텔 방에 들어서자 마음이 착잡했다. 침대 모서리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내가 왜 열쇠를 안 챙겼을까...'
나는 열쇠에 신경 쓰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튀니지에 살 때도, 파리로 이사 온 후에도, 열쇠 때문에 고생한 적이 많아서 늘 예민할 정도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데. 어쩌다 오늘은 깜박했을까.
문득 딸의 말이 떠올랐다.
"엄마, 요새 정신없나 봐. ㅋㅋㅋㅋ"
50대라는 나이. 어쩔 수 없는 걸까.
매일 DELF 시험을 준비하며 단어를 외우는데, 방금 외운 단어도 몇 초 만에 까먹는다. 그래서 가장 무식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공부한다. 쓰면서 외우고,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외운다. 피아노도 마찬가지다. 매일 30분씩 연습하지만, 손이 음계를 익히기까지 수십 번을 반복해야 한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피아노 3학년 시험, C1 자격증, 대학원 입학.
'내가 제정신일까? 혹시 치매는 아닐까?'
온갖 걱정과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지난번엔 가스불에 음식을 올려놓고 까맣게 잊어버려 소방관까지 출동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은 열쇠 수리공을 부르게 됐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문득 생각을 바꿨다.
'지금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없다. 그럼 뭐하러 이렇게 괴로워하지?'
일단 쉬기로 했다. 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다.
비록 예상치 못한 호텔 숙박이지만, 이 순간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속상해하고, 화내고, 짜증 내고, 나를 자책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 비싼 호텔이지만 푹 쉬자. 내일 아침 맑은 정신으로 문제를 해결하자.'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낯선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푹 잤다. 개운하게.
다음 날 아침.
11시 정각에 열쇠 수리공이 도착했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친절했고, 문을 여는 건 정말 간단했다.
"이렇게 쉬운 걸..."
조금 허무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감사했다.
현금 130유로를 건네며 영수증을 받는데, 그가 딸에게 전화로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이거요, 보험으로 환급받을 수 있어요. 100%는 아니지만 보통 60% 이상은 돌려받아요. 꼭 이 영수증 가지고 청구하세요."
"네?! 정말요?"
어젯밤 그가 한 말이 이제야 이해됐다. 내가 아파트 앞에 있었다면 밤에라도 왔을 거라고 했던 거다. 160유로에 바로 해결해줄 테니 어디 있냐고 물었던 건데, 나는 그걸 못 알아듣고 엉뚱한 대답만 했던 거다.
'아, 조금만 더 침착하게 대처했더라면...'
호텔비 125유로를 아낄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60%는 돌려받을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그에게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했다. 그는 딸에게 전화로 상세하게 설명해주면서 꼭 영수증을 가지고 보험 청구를 하라고 당부했다.
언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감사하고 기뻤다. 60%나 되돌려 받을 수 있는 보험 제도가 있다니, 얼마나 기쁘고 다행인지 모른다.
어젯밤 내내 불안해하고 자책하고, 화를 내기보다 현재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할 수 없는 일을 만나게 되었다면 어떤 마음을 갖는 것이 좋은 것인가를 고민했다.
불평하기보다,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 긍정의 마음을 갖고 현실을 직시하며 내가 해야 할 일을 빨리 찾아보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니, 조금만 더 침착하게 이 일을 대처했더라면 호텔 비용 125유로는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긴장해서 불안해서 얼른 해결책을 찾고자 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대처했더라면, 우리는 이런 보험 제도를 알았을 것이고, 그날 밤에 열쇠 문제를 해결하고 단지 30유로만 더 지불하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살면서 우연히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일들을 만날 때가 사실 많다. 그때 어떤 감정과 어떤 생각, 그리고 자세로 이 문제를 바라보느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녁 내내 자신을 탓하고 나이를 탓하고, 파리의 비싼 인건비를 탓하면서 밤을 어둡게, 우울하게 보냈다면 얼마나 그 순간들이, 시간들이 불행하고 의미 없었겠는가.
하지만 나는 푹 잠을 잤다. 그리고 개운한 상태로 일어나서 아침을 맞이했고,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맑은 정신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인생은 그렇다. 어떻게 삶을 바라보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비록 작은 사건이지만 삶의 지혜를 다시 한번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문제에 부딪혔을 때 당황하지 말자. 냉정하게 현실의 닥친 문제를 바라보자. 그리고 긍정의 마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해결책을 찾자.
자신을 탓하거나, 주변인을 탓하거나, 환경을 탓하기보다 우선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 문제에만 집중하자. 가장 좋은 해결책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찾아보도록 하자.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은 오히려 정신을 산만하게 하고 마음과 생각을 더 분산시킬 뿐이다.
파리 유학생으로 나는 오늘 또 한 가지 외국 생활의 지혜를 배웠다. 비록 보험 처리는 아주 늦게 내 통장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은 아주 행정 처리가 느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비록 아주 늦을지라도 들어오긴 들어오니까, 아주 아주 여유롭게 기다려야 하겠지만 말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열쇠는 현관 바로 옆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오후에 옷을 갈아입으러 다시 들어왔다 나갈 때, 깜박하고 안 챙긴 거였다.
"하하..."
웃픈 헤프닝이었다.
비싸니까, 뭔 놈의 물가가 비싸니까 도저히 못 살겠어, 이 놈의 파리에서, 하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까? 물론 아니다.
언어 문제 힘들고, 엉뚱한 동문서답 같은 대화를 하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나는 파리 유학생의 삶을 사랑한다. 그리고 아직 내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나의 목표는 C1 자격증이다. 이 한 가지 목표만을 생각한다. 그다음 일은 그다음에 생각할 것이다.
여러분도 꿈이 있나요?
그 꿈을 향해 가다가 뜻하지 않은 두려움을 만나나요?
포기하지 마세요.
그 꿈을 향해 쭉 나아가세요. 장애물을 하나씩 넘으면서 가세요.
넘어질 수는 있어도, 포기는 하지 마세요.
당신의 인생은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니까요.
늦어도 괜찮습니다.
50대, 파리 유학생이 된 나처럼요.
P.S. 보험 환급은 아주 늦게 들어올 것이다. 프랑스의 행정 처리는 달팽이처럼 느리기로 유명하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들어온다. 아주 아주 여유롭게 기다려야겠지만. 그것도 파리 생활의 일부니까.
넘어질 수는 있어도, 포기는 하지 마세요.
당신의 인생은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니까요.
늦어도 괜찮습니다.
50대, 파리 유학생이 된 나처럼요.
P.S. 보험 환급은 아주 늦게 들어올 거다. 프랑스의 행정 처리는 느리기로 유명하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들어온다. 아주 아주 여유롭게 기다려야겠지만. 그것도 파리 생활의 일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