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파리 유학생의 하루: 파업과 멘붕, 그래도 베르사유로

연재) 늦어도 괜찮아, 50대, 파리 유학생이 되다

by Selly 정

'멘붕'이라는 단어가 있다. 정신이 붕괴된다는, 그 강렬한 표현 말이다. 오늘, 그 단어가 피부로 와닿았다.

프랑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이미 세계가 아는 사실이다. 몇 주 전엔 한국 방송에까지 나올 만큼 큰 시위가 있었고, 지금도 크고 작은 데모가 파리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베르사유 수업 때마다 지하철과 기차 운행 여부를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특별한 데모 소식도 없었기에 당연히 기차가 운행될 거라 믿었다. 지하철 6호선을 타고 앵발리드역에 내려, 베르사유행 기차 플랫폼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한 순간, 시간표 화면이 깜깜하게 꺼져 있었다. 앞이 캄캄했다.


끝없는 미로 속으로

"오늘 운행 안 합니다. 몽파르나스역으로 가서 N 기차 타세요. 빨리요!"

안내원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멍하니 서 있을 시간은 없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 13호선을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아니, 걸었다기보단 날아갔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몽파르나스역까지 가는 길이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인파는 또 왜 이토록 많은지. 사람들 틈을 헤치며 계속해서 "파르동, 실례합니다"를 외쳤다. 어깨가 부딪히고, 가방이 툭툭 부딪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저 멀리 몽파르나스역 입구가 보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 2층, 그리고 마침내 3층까지. 'N train' 표시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후다닥 달려가 전광판을 확인했다.

'4시 9분, 25번 플랫폼'

25번? 25번은 또 어디란 말인가.


똥개 훈련

몇몇 승객들도 나처럼 25번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함께 뛰고, 재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25번 플랫폼은 완전히 다른 방향, 다른 홀에 있었다. 지나가는 안내원들에게 물을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저쪽으로 한참 가면 나올 거예요."

무작정 달렸다. 한참을 가자 '3 Hall'이라는 표시와 함께 '25-28번' 글자가 나타났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런데.

플랫폼에 막 도착한 순간, 기차는 떠나고 있었다.

커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으며 멀어지는 기차를 바라봤다. 다리가 후들거려 옆 의자에 주저앉았다. 허탈함이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수업은 가야 했다. 구원투수 같은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다음 기차 시간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20분에 10번 플랫폼에서 출발해."

10번? 그건 다시 2 Hall로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이고, 여기까지 힘겹게 왔는데...


분노와 체념 사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파업을 하려면 미리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느닷없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러는 걸까. 방송이나 인터넷으로라도 알려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은 눈곱만큼도 없는 건가.

문득 영화 '풀 타임'이 떠올랐다. 파리 외곽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호텔 청소부로 일하는 여성이 교통 파업 때문에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면접 시간에 맞추기 위해, 아이들 등원 시간에 맞추기 위해 온갖 교통수단을 갈아타며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던 그녀. 영화 속 그녀의 숨 막히는 질주가 바로 지금 내 모습이었다.

파업하는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다시 뛰는 것뿐이었다. 20분에 맞추기 위해 경보 선수처럼 빠르게 걸었다. 백팩이 덜렁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20분차도 막 떠나버렸다.

온몸이 지쳤다. 협회장에게 상황을 알리고, 딸에게 다시 물었다.

"35분에 13번 선로."

25번에서 10번, 다시 13번이라니. 오늘 하루 똥개 훈련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체념하듯 13번 선로를 찾아 나섰다.


마침내 도착한 교실

마침내 '베르사유 샹티에'행 기차를 발견하고 올라탔다. 시계를 보니 이미 5시 6분. 가슴은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메말라 있었고, 입술도 바짝바짝 말라 있었다. 숨을 가다듬으며 자리에 앉았다.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5시 25분이 넘어서야 샹티에역에 도착했다. 6202번 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니 권 샘께서 막 전화하려던 참이었다.

"수고했네요. 고생했지요, 오늘."

다행히 상황을 알고 계셔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학생들도 동그란 눈으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줬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 얼굴에서 안도감이 느껴졌다.

숨을 고르며 수업을 시작했다.



IMG-20251006-WA0002.jpg
IMG-20251006-WA0005.jpg
베르사유 상티에역Versailles-Chantiers / 시내 버스 정거장



이것이 파리다

이런 일이 처음일까? 아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한번은 베르사유행 기차를 타고 중간쯤 갔을 때 "더 이상 운행하지 않습니다"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날은 결국 수업도 못 하고 파리로 되돌아와야 했다.

또 어떤 날은 생미셸역에서 베르사유행 RER C가 운행하지 않아 앵발리드역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운행하지 않아 다시 몽파르나스역으로 향했다. 한번은 몽파르나스역에서만 운행한다기에 갔더니 거기도 운행하지 않아 결국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이것이 파리다. 자주 파업하는 파리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자가용이 있는 사람들은 사실 이 불편함을 실감하지 못한다. 불편할 뿐, 절박함까지는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나처럼 학생이고, 아직 자동차가 없는 사람들에게 파업은 심각한 문제다. 시민들이 가장 골탕먹을 때다.

누군가 그러더라. 시민들을 골탕먹여서 불평하게 만드는 게 그들 목적이라고. 그래야 시민들이 정부를 향해 불평하지 않겠냐고. 일리 있는 말이었다. 교통이 파업에 들어가 느닷없이 운행을 멈추면 오늘처럼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한다.

프랑스가 파업 잘하기로 유명한 건 세계가 아는 사실이다. 5년 반을 살아보니 정말 그랬다. 그들도 이런 문화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려니' 하면서.


거북이보다 느린 행정

문제는 나 같은 유학생들이다.

작년 12월에 신청한 거주증을 아직도 받지 못했다.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거주증이 없으면 프랑스 밖 다른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오기 힘들다. 공항에서 입국심사 때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주증이 나올 때까지 꼼짝없이 프랑스 안에만 있어야 한다. 한국 왕래도 쉽지 않다.

그런데 1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소식이 없다. 게다가 지금이 새 거주증 신청 기간인 10월이다. 최소한 거주 기간 끝나기 3개월 전에는 신청해야 하는데, 이전 거주증도 받지 못해 새 신청조차 못 하고 있다.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행정 업무는 정말이지 거북이처럼 느리고 답답하다. 그런데도 파업은 밥 먹듯이 한다. 일하기는 싫고, 삶의 낭만을 즐기고 싶어하는 국민성일까. 일하는 것보다 삶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내일도 베르사유로

오늘 같은 날이 또 올까?

분명 올 것이다. 내일도 저 꺼진 전광판 앞에 멍하니 설 것이다. 또다시 미로 같은 역사를 헤매며 플랫폼을 찾아 뛸 것이다.

똥개 훈련이라도 받는 기분으로 숨 가쁘게 달리면 온몸이 지친다. 짜증도 올라오고, 프랑스 행정에 화도 난다. 그런데도, 이 도시를 떠나고 싶을까?

아니다. 이곳에 더 머물고 싶다. 손끝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꿈이 있으니까. 여전히 이루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 거북이 같은 행정과 예고 없는 파업이 있어도, 파리는 여전히 내게 설렘을 준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교실, 학생들의 눈이 반짝였다. 협회장의 "수고했네요" 한마디에 무너질 듯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그 순간, 알았다. 이 모든 혼란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래서 내일도 베르사유로 간다. 기차가 멈춰 서든, 플랫폼이 또 바뀌든.

이것이 50대, 파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연재)늦어도 괜찮아. 50대, 파리 유학생이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