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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무게를 품은 공간, 클루니 박물관

연재) 늦어도 괜찮아. 50대, 파리 유학생이 되다

by Selly 정

파리 5구, 비 내리는 일요일 오후

낯선 것과 익숙한 것 사이

몇 년을 파리에 살면서도 몰랐다. 21번 버스를 타고 수없이 지나쳤던 그 건물이, 그렇게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는 것을. 마치 매일 마주치는 이웃의 진짜 이름을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그가 위대한 예술가였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50대에 다시 학생이 되어 파리를 걷는다는 건, 이런 것이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거리가 낯설어지고,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이 질문을 던진다. 오늘, 나는 **클루니 중세 국립 박물관(Musée de Cluny)**의 문을 열었다.

입장료 13유로. 한국 돈으로 2만 원이 채 되지 않는 금액으로, 나는 7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티켓을 샀다.


15세기가 살아 숨 쉬는 건물

박물관은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15세기 후반, 클루니 수도원장을 위해 지어진 고딕 양식의 저택, 오텔 드 클루니(Hôtel de Cluny). 이곳은 후에 프랑스 왕실의 거처가 되었고, 1843년 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돌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이 계단을 수도원장도, 왕도, 귀족도 밟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50대 유학생인 내가 밟고 있다. 시간은 흐르지만, 돌은 기억한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숨이 멎었다. 고딕 양식의 아치형 천장이 마치 하늘로 열린 통로처럼 웅장하게 펼쳐져 있었다. 빛은 창문을 통해 대각선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그 빛 속에서 먼지가 춤을 췄다. 700년 된 먼지일까? 어제의 먼지일까?


금으로 빚은 기도, 영원을 꿈꾼 장인들

전시실을 돌며 나는 숨을 죽였다.

중세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조각들, 태피스트리들, 그리고... 유리 케이스 속에서 빛나는 황금 장미를 발견했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가시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조각된 황금 장미. 꽃잎은 얇디얇아서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릴 것 같았다. 700년 전 장인은 이 한 송이 장미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을 보냈을까. 손끝의 감각을 금속에 옮기고, 숨을 참으며 망치를 두드렸을까.

이것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다. 이것은 기도였다. 영원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었다. 살아있는 장미는 일주일이면 시들지만, 금으로 만든 장미는 700년을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금, 50대 유학생인 나의 눈 앞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


20230401_155434.jpg?type=w773 [금으로 만든 장미 - 유리 케이스 속 황금색 정교한 장미 조각품]


돌 속에 새긴 사랑, 에나멜로 입힌 영혼

14세기에 만들어진 잔 드 에브뢰(Jeanne d'Evreux)의 '성모와 아기 예수상'. 금과 에나멜로 정교하게 조각된 이 작품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성모 마리아의 표정에는 슬픔과 사랑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 겪을 운명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눈빛.

그 옆에는 용을 무찌르는 성 게오르기우스(Saint George) 상이 있었다. 15세기 조각가는 돌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칼을 휘두르는 기사의 근육, 날개를 펼친 용의 비늘, 그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일 것 같았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담 조각상 앞에서는 발걸음이 멈췄다. 1260년에 만들어진 무덤 뚜껑 위의 조각. 누군가의 삶이, 죽음이, 그리고 부활에 대한 믿음이 돌에 새겨져 있었다.


필사본 속에 담긴 세계

중세 필사본 앞에 섰을 때, 나는 울컥했다.

**장 푸케(Jean Fouquet)**가 15세기에 제작한 '에티엔 슈발리에의 시간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기도였고, 예술이었고, 노동이었다. 인쇄술이 없던 시대, 수도사들은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베꼈다. 금박을 입히고, 색을 칠하고, 삽화를 그렸다.

'복사 붙여넣기'가 가능한 시대에 사는 내가,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이들의 헌신 앞에서 부끄러워졌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린 필사본, 성인들의 삶을 기록한 책들. 각각의 페이지는 한 영혼의 기도이자, 신에게 바치는 찬가였다.


중세인의 일상, 그들도 우리처럼

기사의 갑옷, 귀족의 식기, 평민의 도구들. 박물관은 중세 사람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은으로 만든 포크, 나무로 깎은 숟가락, 도자기 접시. 그들도 밥을 먹고, 사랑하고, 웃고, 울었다. 700년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 나는 그들과 손을 맞잡는 기분이었다.

어느 전시실에서는 소풍 온 초등학생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이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나도 저 아이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이 공간을 거닐고 있었다. 50대 유학생의 눈빛도, 10대 아이들의 눈빛도, 결국 같은 빛을 향해 있었다.

전시실 한쪽에는 기념품 가게가 있었다. 중세 예술을 모티프로 한 엽서, 책갈피, 작은 복제품들. 사람들은 700년 전의 아름다움을 작은 조각으로라도 집에 가져가고 싶어 했다.


비 내리는 파리, 그리고 시간의 창문

박물관 카페에서 잠시 쉬어갔다. 창밖으로 비가 내렸다. 파리의 봄비는 참 부드러웠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21세기 파리인가, 15세기 클루니인가. 아니면 그 사이 어딘가인가.

박물관을 나와 옆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원의 벤치에는 책을 읽는 노인, 뛰어노는 아이들,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있었다. 중세의 무게를 뒤로하고, 사람들은 2023년의 일요일을 살고 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잿빛 구름 사이로 햇살이 새어 나왔다.

늦어도 괜찮다.

50대에 다시 학생이 된 것도, 몇 년을 살면서도 이제야 이 박물관을 찾은 것도. 중세 장인들이 황금 장미 한 송이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쳤듯, 나도 천천히, 내 속도로, 내 이야기를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700년을 기다린 건물

돌아가는 길, 나는 박물관을 한 번 더 돌아봤다.

고딕 양식의 붉은 벽돌 건물,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 아치형 창문. 비에 젖은 건물은 더욱 깊은 색을 띠었다. 15세기의 건축물이 21세기의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이 건물은 수도원장의 저택으로 태어나, 왕실의 거처가 되었고, 지금은 모든 이에게 열린 박물관이 되었다. 건물도, 예술도, 사람도 변한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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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루니 박물관 외부 전경 - 비 내리는 날의 고딕 양식 붉은 벽돌 건물과 첨탑]


파리에 오신다면, 서두르지 마세요. 클루니 박물관은 700년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의 방문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언제 오든, 이곳은 당신을 환대할 것입니다.

늦어도 괜찮습니다. 중세 장인들처럼, 천천히 당신만의 걸작을 만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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