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늦어도 괜찮아. 50대, 파리 유학생이 되다
5년 반이라는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갔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자연스레 한인 사회 일원이 되었다. 작은 공동체였기에 한글학교도, 교회 활동도, 크고 작은 모임도 저절로 품 안에 안겼다.
하지만 파리는 달랐다.
이곳은 너무 넓고, 너무 많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한인 사회는 분명 존재했지만, 거대한 도시 속에 흩어져 있었다. 적극적으로 찾지 않으면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는, 말 그대로 철저히 개인화된 삶. 각자가 뚜렷한 목적을 품고 이곳에 왔기에, 굳이 한인 커뮤니티를 두드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외로운 유학생들에게는 다른 이야기겠지만, 여행 에세이 작가로, 학생으로, 또 한 명의 파리지엥으로 살아가기에도 숨 가쁜 나날들이었다. 여행하고, 글 쓰고, 언어 공부하고, 비자 유지를 위해 학교 다니기를 반복하다 보니, 정작 사랑했던 것들은 서랍 깊숙이 밀려났다.
합창. 그 황홀했던 하모니의 순간들.
한국에서든 어디서든 늘 목소리를 높이 띄우며 노래했던 사람이, 어느새 노래조차 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목소리가 잠기고 있었다. 예전의 맑고 청아하던 음색이 사라지고, 낯선 탁함만 남아 있었다. 노래도 악기처럼 계속 사용하지 않으면 녹슬고 무뎌진다는 걸, 몸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놀라움이 밀려왔고, 이내 문제의식이 고개를 들었다.
'안 돼. 이대로는 안 돼.'
무언가를 해야 했다. 진짜 좋아하고, 진정으로 갈망했던 그 활동을.
합창단 모집 공고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처럼 필연처럼 '재불 한인 여성회' 포럼 소식이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신청했고, 다행히 다음 날 초청장이 날아왔다.
3주 후, 생망데 시청.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따뜻한 미소들이 나를 맞았다. 모든 분이 친절했고, 다정했다. 한인 여성회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 어떤 의미를 지닌 단체인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처음엔 망설여졌다. '계속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하지만 그 고민을 눈치채신 분이 부드럽게 안심시켜 주셨다.
"100명 넘는 회원이 활동하고 있어요. 강제성은 전혀 없고, 1년에 3~4번 정도만 참여하시면 돼요. 프랑스와 한국 문화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봉사단체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그 말이 마음을 녹였다. 이제 조금 더 깊이, 이 나라 안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쾌히 회원 가입을 했다.
"포럼 끝나고 문화 행사가 있으니 꼭 보고 가세요."
궁금했다. 과연 어떤 무대가 펼쳐질까.
30분 후, 대형 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인들, 프랑스인들,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 정성스레 차려진 다과와 음식들 사이로, 전통 문화 공연 안내서가 손에 들려졌다.
그리고 그 안내서를 훑다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합창단.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연락처조차 알 수 없어 애태웠던 바로 그 합창단이 여기 있었다. 세상에나.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가슴이 뜨거워졌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 이렇게도 인연이 되는구나.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면,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이루어지는구나.'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인생의 비밀 하나를 배우는 순간이었다.
'마음속 깊이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엄청나게 중요한 깨달음 아닌가. 우리는 수많은 소원을 품고 산다.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금세 포기한다. 이번 일을 통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정말, 진짜로 간절히 원했던 걸까? 아니면 안 이루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걸까?'
합창단 단장님은 우아하고 다정한 분이셨다. 차분하고 따뜻한 어조로 나를 반겨주셨고, 다음부터 함께 활동하자고 말씀하셨다.
"네, 꼭 참여하고 싶어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기뻐요."
행운이었다. 이토록 인상 좋은 분들과 함께 노래할 수 있다니.
포럼 이후 펼쳐진 무대는 환상 그 자체였다.
삼고무, 케이팝, 모듬북이 리듬을 타고, 임채욱 바리톤의 독창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정다운 합창단의 화음이 울려 퍼지고, 사물놀이가 흥을 돋웠다. 그리고 프랑스로 입양된 이들로 구성된 뿌리협회의 한복쇼까지.
전통 악기가 울려 퍼지고, 노래가 공간을 채우고, 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합창단이 가곡을 부르기 시작했을 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왜일까.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까. 외국에 나오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더니, 그 말이 뼈저리게 실감났다. 이국땅에서 듣는 한국 노래는 아련하고도 뜨거웠다. 마음 한편이 후벼지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따스한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원형 탁자를 중심으로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옆자리에는 여성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한국 여성과 프랑스 가족들, 한국전쟁 참전 용사 가족들, 프랑스로 입양된 분들과 그 가족들이 함께했다.
프랑스 남성과 결혼한 분의 딸은 인형처럼 사랑스러웠고, 참전 용사 가족분들은 한국 문화와 음식—김밥, 닭강정, 부침개, 잡채, 나물반찬, 겉절이, 밥과 김치—을 무척 사랑하셨다.
처음 만난 나를 마치 오랜 친구처럼 반겨주셨다. 참전 용사라는 인연의 끈 때문이었을까. 흐뭇한 미소로 이야기를 건네시고, 만난 것에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언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함께 박수 치고, 음식 나누고, 웃으며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박수를 칠 때는 물개 박수로 열렬히 응원해 주셨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국 문화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한국어 소리가 너무 좋아요. 듣고 있으면 행복해져요!"
그 말을 들을 때,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불끈 솟아올랐다.
'아, 이게 문화의 힘이구나. 이게 한 국가의 힘이구나.'
온전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오늘 이 포럼에 온 게 정말 잘한 일이었다.
조금 더 일찍 참여하지 못한 게 아쉽기도 했지만, 지금이라도 이 자리에 있다는 게 감사했다. 이렇기 때문에 한인 커뮤니티에 적어도 하나쯤 참여하고 사는 게 중요하구나, 다시 한번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 외국에서 살아가는 이가 있다면 전하고 싶다. 한인 커뮤니티, 한 번쯤 두드려보시길.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재불 한인 여성회와 합창단 가입. 그 선택에 무척 만족한다. 프랑스에 살면서 한국 문화를 조금이나마 알리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부심을 직접 느끼는 순간이 이렇게 벅찰 줄이야.
앞으로 어떤 활동들이 펼쳐질지, 솔직히 나도 기대된다.
늦어도 괜찮다.
50대에 시작해도, 5년이 지나서 깨달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여러분도 기대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