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늦어도 괜찮아. 50대, 파리 유학생이 되다
올해 3월 27일, 언니에게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평소처럼 별생각 없이 카톡을 열었다. 습관처럼, 무심하게. 언니와는 가끔 문자를 주고받기에 일반적인 안부 인사려니 했다.
'엄마가 많이 위독해. 어제 서울 형제들이랑 올케들이 다 와서 마지막 인사 나눴어. 엄마 숨만 겨우 쉬고 있어. 의사들은 마음 준비하래. 올 수 있으면 얼른 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아, 엄마가 드디어 돌아가시려나. 아니, 그래도 아직은 아니겠지. 아직은 괜찮으시지 않나?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은 이미 항공권 검색 사이트를 열고 있었다. 최대한 빠른 날짜로 비행기편을 잡았다. 28일 출발. 가장 빠른 편이었다.
딸에게 급히 연락했다. 할머니 위독 상황을 알리고, 혼자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경제적 형편상 두 사람 비행기표를 예매할 수 없었다. 가방에 옷가지 몇 벌 급하게 던져 넣고, 학원장에게 황급히 전화했다.
"엄마가 위독하셔서... 수업을 못 하게 돼서 정말 죄송합니다."
"걱정 마세요. 수업은 어떻게든 대타를 구해서라도 진행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마음 따뜻한 학원장이었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이해해주는 그 목소리에 꽁꽁 얼어붙었던 가슴이 살짝 녹아내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느닷없는 부탁에도 걱정 말라고 위로해주니, 훈훈함이 가슴에 번졌다.
28일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9일 저녁, 한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곧장 언니에게 전화했다.
"언니, 도착했어.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가자. 오전 일찍 가면 좋을 것 같아."
"그래! 면회 시간이 오전 10시니까, 9시쯤 출발하자. 내일 봐."
전화를 끊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언니 목소리가 그리 급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왠지 며칠은 더 버티실 것 같았다. 아니, 거짓말처럼 다시 회복되어 아픈 몸이지만 계속 살아계실 것만 같았다.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29일 밤을 보냈다. 왠지 내일이면 괜찮아질 것 같았기에.
다음날 아침.
아빠, 언니와 함께 엄마가 계신 요양원으로 출발했다. 언니 차 안에서 우리는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단순한 안부 인사 몇 마디뿐. '설마 무슨 일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병원에 도착한 날. 3월 30일.
엄마 병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엄마는 삐쩍 말라 있었다. 몇 주 전부터 전혀 드실 수가 없어서 링거 주사로 하루하루 연명하고 계셨다. 짧은 상고머리 커트, 초점을 잃은 눈빛. 눈은 떠 있지만 날 바라보는지, 어딜 보는지 알 수 없는 텅 빈 눈빛이었다.
엄마 손을 잡았다.
너무 말라버린 손가락들. 손등 핏줄이 마치 오래된 나무 뿌리가 도드라져 올라온 것처럼 울퉁불퉁하게 솟아나 있었다. 고개는 힘없이 옆으로 꺾여 있었다. 반듯하게 베개에 눕혀도 탄력 잃은 고무줄처럼 툭 하고 다시 흐물흐물 축 처졌다.
"엄마, 나 왔어. 엄마, 나 왔다고. 엄마, 나 알아봐? 엄마, 미국 간 막내딸 왔어. 엄마, 내 말 알아들어?"
엄마는 초점 없이 그저 가느다랗고 힘없는 숨만 쉬고 있었다. 그 숨마저 간간이 끊어지다 이어지고, 끊어지다 이어지곤 했다.
"엄마..."
계속 엄마를 불러댔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엄마, 이제는 맘 편히 쉬어. 그동안 병원에서 고생했어. 엄마, 이제 천국에서 행복하게 지내. 그동안 병원에서 너무 외로웠지. 가족들도 일주일에 한 번밖에 못 보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서 얼마나 외롭고 보고팠어. 힘들었지, 엄마."
가슴이 미어졌다.
타향에서 살다 보면 안다.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얼마나 힘든지. 친구도 없고, 대화할 상대가 없을 때, 그 외로움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특히 엄마는 나이가 들어서 무척 외로워하셨다. 자식들을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하셨다.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아빠와 함께 사실 때였다. 엄마를 방문하고 돌아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우리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말씀하셨다.
"잘 가라, 잘 가! 또 와라!"
매번 엄마 레퍼토리였다.
"알았어요, 엄마! 또 시간 되면 올게요.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또 올게요. 얼른 들어가세요, 추워요!"
몇 번이고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라고 말한 후에 뒤돌아서서 엄마 시야에서 사라지곤 했다.
그토록 자식들을 보고 싶어 하던 엄마였다.
그런데 죽음을 맞이할 시기에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자식들 얼굴을 자주 볼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난 정말 착한 딸이 아니었다.
파리에서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자기계발 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도서관에 다니고, 뭔가 배우러 다니기 바빴다. 엄마가 매번 "자주 와라, 자주 와" 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엄마, 나 바빠.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해" 라며 늘 시간 없다는 핑계를 댔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때론 2주에 한 번 엄마를 방문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집에 있는 반찬이 늘 같은 것이었지만, 그것들을 다 꺼내 놓고 말씀하셨다.
"이것도 먹어라, 저것도 먹어."
있는 반찬, 없는 반찬 다 꺼내서 차려주셨다. 그리고 꼭 하시는 말.
"뭐가 그리 바쁘냐?"
이 당시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남편 회사가 힘들어져서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았다. 때론 3개월, 심지어 6개월이 훌쩍 지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때론 카드나 보험 대출로 근근이 버텼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 집에 갈 때마다 뭐라도 들고 가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아빠가 좋아하는 것 한 가지라도, 엄마가 좋아하는 뻥튀기라도, 요구르트라도 손에 들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마저 부담이 될 때가 많았다.
'지금 여유가 없는데... 지금은 당신이 자랑스러워 하는 유 서방의 회사가 힘들어서 살기가 퍽퍽한데...'
차마 이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엄마에게 난 자랑스러운 딸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미국에 산다고 생각하셨다. 엄마가 아는 외국은 오직 미국이었다. 엄마에게 미국은 '대단한 사람들만이 가는 나라, 잘난 사람들이 사는 나라'였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미국에 산다고 생각하고, 날 자랑스러운 딸로 여기셨다.
엄마 단골 목욕탕에 함께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 엄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그곳에서 뭔가를 잘 퍼주는 할머니였다. 자식들이 준 돈으로 가끔씩 요구르트로 인심을 쏘는 호탕한 할머니였다.
내가 함께 목욕탕에 간 날은 엄마 행복지수가 높이 올라갔다.
목욕탕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에게 환하고 큰 목소리로, 주변 사람들이 듣든 안 듣든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미국에서 우리 딸이 왔어!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막내딸이 왔어요!"
"아, 그래요? 할머니, 할머니가 자랑하시던 그 딸이 왔군요. 좋으시겠어요."
"응, 아주 좋아요! 오늘은 내가 요구르트 쏠게요.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다 요구르트 하나씩 돌려요!"
그럴 때마다 창피해서 빙긋이 웃기만 했다. 내가 뭐라도 되는 사람처럼 말씀하시는 엄마 앞에서 부끄러웠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랑스러운 딸이 아닌데... 파리에 있을 뿐인데... 세상 기준에서 말하는 멋진 직장을 다니는 딸도 아닌데...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딸인데...'
그런 마음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나와 함께 목욕탕에 오는 날은 엄마가 때 빼고 광내는 날이었다. 호기롭게 요구르트도 한턱 냈다. 기분마저 좋아서 이제는 때밀이 서비스까지 받으셨다.
"세신 언니야!"
엄마는 때밀이를 '세신 언니'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니까, 엄마도 그냥 그렇게 부르셨다.
"세신 언니야, 오늘은 나 세신 좀 해줘. 딸이 해준대. 오늘 아주 편안하게 푹 쉬었다 가는 날이야. 오늘은 광내고 예뻐지는 날이야."
엄마는 오늘 정말 행복해하셨다. 자랑스러운 막내딸이 왔고, 그런 막내딸이 세신까지 해주니, 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너무 너무 행복해하시는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엄마, 오늘 어땠어? 탕에 오래 있어서 안 피곤해?"
"아니, 하나도 안 피곤해. 너무 너무 좋아. 엄마는 오늘 너무 좋다. 좋아.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좋아!"
그렇게 엄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흥얼거리며 집으로 가셨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흐뭇한지 몰랐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저려왔다.
'아, 엄마! 내가 엄마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미국에서 부자로 잘 살고 있는 잘 난 막내 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엄마가 좋아하는 사우나도 자주 오고, 또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세신을 원 없이 받게 해줄 텐데'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몹시 슬퍼졌다. 여유롭지 못한 형편 때문에 부모님이지만 맘껏 해드릴 수 없는 내 처지가 때론 원망스러웠다.
'내가 조금 만 더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면, 엄마가 생각하는 것처럼 미국에서 잘 사는 부자 막내딸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열망이 내 마음을 우울하게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