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늦어도 괜찮아. 50대, 파리 유학생이 되다
피멍 든 엄마 팔과 발을 쓰다듬으며 계속 중얼거렸다.
"엄마, 괜찮아. 엄마, 이제 편히 쉬어."
엄마는 있는 힘껏 숨을 쉬고 계셨다. 크게 호흡을 한 번 한 후, '푹, 휴~~' 하는 소리를 내면서 가까스로 숨을 이어가셨다.
아직은 세상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간절함이었을까? 아직은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 옆에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은 간절함이었을까?
시꺼멓게 멍든 팔. 링거 바늘 자국이 온통 박힌 손등. 그 손을 꼭 잡고 쓰다듬었다. 차갑지 않았다. 아직 따뜻했다. 아직 엄마는 여기 계셨다.
"엄마, 내가 여기 있어. 엄마, 나 여기 있어."
반복해서 말했다. 엄마가 들으실 수 있을까? 내 목소리가 엄마 귓가에 닿고 있을까?
그러나 어느 순간, 엄마 눈이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숨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고. 간혹 맺혔던 눈물도 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아빠가 눈물을 흘렸다. 언니가 눈물을 흘렸다.
"엄마, 엄마!"
엄마 손을 굳게 잡은 아빠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고생했네. 그동안 수고했어. 고맙네, 고마워."
80평생을 함께한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평생 강했던 아빠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엄마가 숨을 크게, 있는 힘껏 내뿜었다.
'푸~~~'
아주 커다란 호흡이었다.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다해 내뿜는 숨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완전히 떨구었다.
해외에 있는 남편이 핸드폰 너머로 엄마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엄마는 그렇게 내 곁에서, 내가 손을 잡고 있을 때, 완전히 숨을 거두었다.
유봉순 씨. 그렇게 87세의 생을 마감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엄마 손을 잡고 있었다. 여전히 따뜻했다. 방금까지 살아계셨는데. 방금까지 숨을 쉬고 계셨는데.
"엄마... 엄마..."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 정말 엄마가 가신 거구나. 이제 정말 엄마 목소리를 들을 수 없구나.
나중에 언니가 말했다.
"엄마가 너를 기다린 것 같아. 네가 보고 싶어서 엄마가 지금까지 힘겹게 숨을 붙들고 있었던 것 같아."
언니 목소리가 떨렸다.
"사실은 의사가 이미 27일에 사망 선고를 했거든. 그런데 엄마가 네가 올 때까지 벌써 3일 동안 숨을 놓지 않고 있었던 거야. 막내딸을 보고 싶어서, 막내딸의 목소리를 꼭 듣고 싶어서, 엄마는 차마 숨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것 같구나."
3일.
의사들이 이미 포기했는데도 엄마는 3일을 더 버티셨다. 링거와 피 주사만으로 3일을 더 견디셨다. 막내딸을 기다리면서.
죄책감이 밀려왔다. 더 일찍 올걸. 더 자주 찾아뵐걸.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드릴걸.
"수고했다. 네가 엄마의 임종을 지켰네."
언니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엄마는 나와 함께 그렇게 30분을 보냈다. 분명 내 목소리를 들었다. 내 기도를 들었다. 막내딸 손의 따스함을 느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마지막에 온 힘을 다해 커다란 숨을 '푸~' 내쉰 후에 눈을 감으셨다.
언니가 간호사를 불렀고, 간호사는 담당 의사를 불렀다.
급히 달려온 의사는 엄마를 이러저리 살피더니 사망 신고를 내렸다.
'몇 월 몇일 몇 시, 유봉순 씨 사망.'
87년의 삶이 그렇게 한 줄로 정리되었다.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되었다. 언니는 곧바로 상조회사에 연락했고, 30분쯤 후에 장의사가 도착했다. 엄마는 하얀 천으로 덮였다.
하얀 천 아래 엄마가 누워계셨다. 더 이상 숨 쉬지 않는 엄마. 더 이상 말씀하지 않는 엄마.
인생 처음으로 장의사가 운전하는 봉고차를 탔다.
좌석에 앉았다. 내 바로 뒤에 엄마가 들어간 관이 안착되었다. 돌아볼 수 없었다. 돌아보면 무너질 것 같았다.
차창 밖 풍경이 지나갔다. 평범한 거리. 평범한 사람들. 평범한 하루.
하지만 내겐 평범하지 않은 하루였다. 엄마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슬픔이 뭔지 느낄 시간도 없었다. 그저 엄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 채, 제3자처럼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형제자매들이 속속 찾아왔다. 우는 사람, 통곡하는 사람, 비통해하는 사람. 각자의 심정을 안고 장례식장으로 들어왔다.
"언니..."
"막내야..."
형제들과 포옹했다. 누군가는 울었다. 누군가는 말없이 어깨를 토닥였다.
빈소가 차려졌다. 엄마 영정 사진이 놓였다. 환하게 웃고 계시는 엄마. 건강하실 때 찍은 사진이었다.
"엄마..."
영정 앞에 섰다. 사진 속 엄마가 날 보고 계셨다. 하지만 진짜 엄마는 저 뒤 관 속에 누워계셨다.
3일장.
문상객들이 왔다 갔다. 고개 숙여 인사받고, 절하고, 또 인사받고. 반복되는 3일이었다.
밤이 되면 빈소를 지켰다. 형제들과 돌아가며 엄마 곁을 지켰다. 촛불이 타들어갔다. 향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끔 엄마 영정을 올려다봤다. 사진 속 엄마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계셨다.
'엄마, 정말 가신 거예요? 정말 다시는 못 뵙는 거예요?'
그제야 조금씩 실감이 났다. 엄마가 정말 돌아가셨구나.
3일 후, 엄마를 화장했다.
영락공원. 화장장에서 엄마의 관이 들어갔다. 불길이 타올랐다.
형제들이 모두 울었다. 평생 강했던 아빠도 울었다.
그제야 나도 울었다.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엄마..."
87년의 삶이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엄마의 유골이 나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엄마. 손을 잡으면 따뜻했던 엄마. 이제 차가운 뼛가루가 되었다.
엄마의 유골은 항아리에 담겼다. 그리고 영락공원 봉안당에 고이 안치했다.
이것이 한 여인의 인생이었다.
모든 일은 겨우 며칠 만에 일어났다.
3월 29일 저녁 한국에 도착했고, 그다음 날 10시에 엄마를 만났고, 엄마는 10시 30분쯤 나의 손 안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3일 후에 한 줌의 재가 되어 항아리 속에 고이 잠겼다.
87년의 삶. 그 긴 세월이 단 며칠 만에 정리되었다.
엄마는 밤에 스위치를 못 찾아 넘어지는 바람에 대퇴골이 골절되었다. 그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후 1년 반 만에 눈을 감았다. 나이 86세 때의 일이다.
한순간이었다.
7명의 자식을 낳고, 그중 한 명을 자신보다 먼저 보낸 아픔을 겪었지만, 다른 6자식으로 인해 삶의 기쁨과 희망을 안고 살았던 한 여성. 그 인생이 갑작스러운 한순간의 실수로 끝났다.
우리네 인생은 이처럼 한순간일지 모른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린 알 수 없다. 영원히 살 거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내일도 엄마가 계실 거라고, 다음 달에도 엄마를 뵐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산다.
그러나 아니었다. 우리 인생은 유한하다. 엄마와의 시간도 유한했다.
엄마의 죽음을 보면서 생각했다.
한 인간의 인생이 하얀 도화지 위에 한 편 한 편 그려지다가 언젠가는 그 도화지가 그림으로 다 채워져서 닫히는 것 같았다.
지나온 과거의 그림은 언제든 펼쳐서 볼 수 있다. 목욕탕에서 요구르트 돌리시던 엄마. 베란다에서 손 흔들시던 엄마. 대추를 내 앞에 놓아주시던 엄마. 그 그림들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그다음 장의 도화지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얀 도화지일 뿐이다.
그 도화지 위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 그것은 오로지 본인의 선택이다.
엄마가 그린 인생, 결코 헛되지 않았다.
가난하고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서 한국전쟁도 겪고, 오빠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성실한 남편을 만나 7자식을 낳고 80평생을 사셨다. 자식들을 모두 키워내고, 면장 부인으로 살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사셨다.
완전한 만족은 아닐지언정, 행복한 삶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은 아쉽다.
좀 더 일찍 물어볼걸. 좀 더 많이 대화할걸. 좀 더 자주 찾아뵐걸.
'엄마! 엄마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어볼걸.
엄마는 아마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나, 나는 행복했어. 이만하면 정말 행복하고 복받은 삶을 살았어. 나는 내 인생에 만족해. 그래서 정말 감사하고 감사해.'
라고 말이다.
엄마, 그렇죠? 엄마는 행복하셨죠?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고 싶다.
엄마, 사랑해요. 늘 사랑했어요. 말로 많이 표현하지 못했지만, 정말 사랑했어요.
천국에서 편히 쉬세요, 엄마.
좋은 곳에서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