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화 - 조급함의 시작
새벽 5시 반. 알람 소리가 어둠을 가른다.
서경자는 눈을 떴다. 스마트폰 화면의 차가운 빛이 천장을 희미하게 비췄다. 손을 뻗어 알람을 끄고, 이불을 걷어냈다. 11월 새벽 공기가 발목을 훑고 지나갔다.
12년이었다. 이 시간에 일어난 지.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 속 얼굴을 보았다. 52세. 눈가의 주름, 처진 눈꺼풀, 희끗희끗 섞인 머리카락.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물줄기가 손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가웠다. 하지만 정신은 또렷해졌다.
부엌으로 갔다. 낡은 싱크대, 녹슨 수도꼭지. 단독주택은 늘 이랬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수리할 곳은 끝이 없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어젯밤 남은 김치찌개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웅- 웅- 돌아가는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채웠다.
창밖을 내다봤다. 좁은 마당에 빨랫줄이 걸려 있었다. 담장 너머로 이웃집 지붕이 보였다. 슬레이트 지붕. 이 동네 집들은 다 그랬다. 오래되고, 낡고, 재개발 소문만 20년째 도는 동네.
밥을 먹으면서도 경자의 머릿속엔 어젯밤 본 영상이 맴돌았다.
'주택 임대 사업자'. '갭 투자'. '월세 수입'.
그 단어들이 마치 주문처럼 반복되었다. 숟가락으로 김치찌개를 떠서 입에 넣었지만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씹고, 삼키고, 다시 떴다.
현관문을 나섰다. 대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골목길은 어두웠다. 가로등 몇 개만이 희미하게 길을 비췄다. 발밑으로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경자는 걸었다. 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왔다. 편의점 불빛이 보였다. 24시간 켜져 있는 형광등. 그 앞을 지나쳐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생각했다. 버스에 올라타서도 생각했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 빈 좌석에 앉았다. 창밖으로 어둠 속 거리가 지나갔다.
'내 돈 적게 들고... 전세로 시작해서... 나중엔 월세 받고...'
영상 속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대형마트 직원 입구로 들어섰다. 형광등 불빛이 눈부셨다. 직원 통로로 걸어가 타임카드를 찍었다. 딱- 소리와 함께 06:28이라는 숫자가 찍혔다.
유니폼을 입었다. 연두색 조끼. 가슴팍에 '서경자'라는 이름표. 12년 동안 입었던 옷. 거울을 보았다. 조끼 속 자신의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아직 영업 시작 전이었다. 개장은 오전 10시. 그 전까지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진열대를 정리했다. 먼지를 닦았다. 상품을 채웠다. 가격표를 확인했다. 유통기한을 점검했다.
라면 코너를 지나다가 발걸음이 멈췄다. 가격표가 바뀌어 있었다.
'신라면 5개입... 4,980원?'
한 달 전만 해도 4,500원이었다. 480원이 올랐다.
경자는 다른 상품들도 봤다. 식용유 한 통. 9,800원. 지난달엔 8,500원이었다. 달걀 한 판. 6,500원. 한 달 전 5,800원.
'다 올랐네...'
동료들이 하나둘 출근했다. 인사를 나눴다.
"언니, 안녕하세요."
"응, 왔어?"
계산대로 갔다. 1번 계산대. 경자의 자리였다. 의자에 앉았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소리가 들렸다. 띠리리링- 스캐너를 점검했다. 빨간 레이저 불빛이 깜빡였다. 영수증 용지를 확인했다. 잔돈을 정리했다.
모든 게 12년 동안 반복해온 동작이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전 10시.
자동문이 열렸다.
첫 손님이 들어왔다.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유모차를 끌고 있었다. 아이 용품 코너로 향했다. 경자는 계산대에 앉아 매장을 바라봤다.
오전엔 주로 젊은 주부들이 왔다. 유모차를 끌고, 아이 손을 잡고, 장바구니를 들고. 바쁘게 움직였다.
손님이 계산대로 왔다. 기저귀, 분유, 물티슈.
"삐-" "삐-" "삐-"
스캐너가 바코드를 읽었다. 기계음이 울렸다. 경자의 손은 자동으로 움직였다. 물건을 스캔하고, 가격을 확인하고, 봉투에 담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기저귀를 스캔하면서도 머릿속에선 다른 생각이 돌아갔다.
'이렇게 평생 일만 하다가... 노후는...'
분유를 스캔했다.
"삐-"
'월세... 매달 들어오는 돈... 그럼 괜찮을까...'
"저기요, 계산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자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네? 아, 죄송합니다."
화면을 봤다. 물티슈를 두 번 찍었다. 취소 버튼을 눌렀다. 다시 계산했다.
"47,300원입니다."
여자가 카드를 내밀었다. 경자는 카드를 받아 단말기에 긁었다. 영수증이 출력되었다.
"감사합니다."
여자가 유모차를 끌고 나갔다.
경자는 한숨을 쉬었다. 손이 떨렸다.
'정신 차려. 일에 집중해.'
하지만 다음 손님이 오는 동안에도, 그 다음 손님을 계산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점심시간.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경자는 휴게실로 갔다.
테이블에 앉았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냈다. 김밥 한 줄. 플라스틱 용기를 열었다. 참치와 단무지가 들어 있었다.
휴게실 구석에 TV가 켜져 있었다. 늘 틀어놓는 뉴스 채널. 경자는 김밥을 먹으며 무심코 화면을 봤다.
"...2021년 전국 주택 매매가격이 9.9% 상승하며 200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경자의 손이 멈췄다.
앵커가 계속 이어갔다.
"특히 수도권의 경우 12.8%나 올랐으며, 서울은 6.47%, 경기도는 무려 16.56%, 인천은 16.42%의 상승률을 보였습니다."
화면에 아파트 단지들이 나왔다. 분양 현장. 상담받는 사람들.
"전세 가격도 6.51% 상승하며 서민들의 주거 부담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특히 임대차 3법 시행 이후 전세 물량이 급감하면서 전세난이 심화되고 있는데요."
김밥을 씹는 것도 잊고 TV를 바라봤다.
"한 직장인은 '전세 계약 만료를 앞두고 집주인이 2천만 원을 더 올려달라고 했다. 어디서 그 돈을 구하냐'며 하소연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30대 남자가 인터뷰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대출도 한계가 있잖아요. 이러다 월세로 쫓겨날 것 같아요."
경자는 숨을 삼켰다.
"코로나19 이후 초저금리 기조가 지속되면서 풍부한 유동성이 부동산 시장으로 몰리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오피스텔 분양 현장.
"아파트 대체재로 주목받고 있는 오피스텔의 경우 청약 경쟁률이 1,000대 1을 넘는 곳도 속출하고 있습니다."
오후 3시.
동료 미숙이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47세. 경자보다 5살 아래.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언니, TV 보고 있어요?"
미숙이가 TV 쪽을 고개로 가리켰다.
"응... 집값 얘기 나오네."
"진짜 미친 것 같아요. 우리 엄마 말로는 동네에서 오피스텔 사는 게 유행이래요."
경자의 귀가 쫑긋했다.
"특히 한강뷰가 인기래요. 1년 만에 값이 2천에서 3천씩 올랐대요!"
"..."
"마포 한강뷰 오피스텔이라고 했는데, 중개소들이 난리래요. 매물 있으면 금방 팔린다고."
경자는 김밥을 삼켰다. 목이 메었다. 생수병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30대 초반 후배 정주가 핫도그를 들고 휴게실로 들어왔다. 미숙이 옆자리에 앉았다.
"뭐 얘기해요?"
"오피스텔 얘기. 요즘 다들 산다고 난리잖아."
정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들었어요. 요즘은 안 사면 뒤떨어진다고들 하거든요. TV에서도 맨날 집값 오른다고 하잖아요."
미숙이가 컵라면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말을 이었다.
"우리 엄마 친구분이 오피스텔 하나 사셨는데, 갭이 1,500만 원 정도였대요. 취득세 같은 거 다 해도 3,000만 원 정도면 된다고."
경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월세는요?"
"그게 처음엔 전세로 들어오니까 월세가 거의 없대요. 근데 2년마다 조금씩 월세로 전환하는 거지. 처음엔 10만 원 정도 받다가, 그 다음 2년은 20만 원, 또 그 다음은 30만 원... 이런 식으로 계속 올려서, 한 10년쯤 지나면 80만 원에서 100만 원까지 받을 수 있대요."
정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처음엔 돈이 안 들어오네요?"
"응, 그렇지. 근데 그 대신 내 돈이 적게 들잖아. 전세금을 임차인이 넣어주니까. 그리고 몇 년 기다리면 나중엔 매달 돈이 들어오는 거야. 우리 엄마 친구도, 이웃집 언니도 다 그렇게 했어."
휴게실 분위기가 한순간 바뀌었다.
경자는 도시락을 먹는 척하며 귀를 기울였다. 손은 움직였지만 정신은 온통 그 대화에 쏠려 있었다.
"경자 언니."
미숙이가 경자를 바라봤다.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언니도 할 수 있어요."
"...생각해 본 적 없었어."
"근데 진짜 쉬워요. 갭 투자로 사는 사람들이 요새 한둘이 아니에요.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도 다들 하고 있어요. TV에서도 계속 집값 오른다고 하잖아요."
경자는 미숙이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모두가 하고 있어. 나만 안 하고 있어. 집값은 계속 오르고...'
정주가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물며 거들었다.
"맞아요. 언니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요즘은 다들 그렇게 노후 준비한대요. 내 돈 3,000만 원 정도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노후 준비... 3,000만 원...'
그 말이 가슴에 꽂혔다.
미숙이가 덧붙였다.
"우리 엄마 친구분도 처음엔 남편분이 엄청 반대했대요. 근데 첫 월세가 통장에 들어오는 걸 본 순간, 얼굴이 확 바뀌었대요."
"..."
"경자 언니도 해보고 싶지 않아요?"
경자는 대답 대신 물만 한 모금 더 마셨다.
휴게실 벽시계가 오후 3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휴식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미숙이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했다.
"언니, 남편 분이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그럴 것 같아."
"근데 다 그렇게 시작한대요. 시작만 하면 괜찮아진다고."
'시작만 하면...'
그 말이 경자의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만 울려 퍼졌다.
오후 4시.
손님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서 장을 보러 온 사람들로 계산대 앞에 줄이 섰다.
한 60대 여자가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라면 5개입 3봉지, 식용유 2병, 달걀 2판.
"삐- 삐- 삐-"
경자가 스캔하며 말했다.
"총 52,800원입니다."
여자가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지난달보다 또 올랐네. 이게 얼마나 올랐어요?"
"...네. 라면이랑 식용유가 좀 올랐습니다."
"참나. 물가가 미쳤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고."
여자는 지갑을 꺼내 카드를 내밀었다. 손이 떨렸다.
경자는 카드를 받으며 여자의 얼굴을 봤다. 주름진 얼굴. 피곤한 눈빛. 거울 속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다음 손님. 40대 남자. 맥주 6캔, 라면 한 봉지, 김치 한 통.
"25,600원입니다."
남자가 현금을 꺼냈다. 만 원짜리 지폐 세 장. 경자는 거스름돈을 세어 줬다.
"4,400원 거슬러 드립니다."
남자는 거스름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맥주값도 올랐네... 이것도 못 마시겠어."
계산은 계속 이어졌다. 손님들의 한숨도 계속 이어졌다.
퇴근길.
오후 6시. 경자는 유니폼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가방을 챙겼다. 타임카드를 찍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봐요, 언니."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직원 출구로 나왔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저녁 거리는 어둑했다. 상점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켰다.
포털 검색창에 손가락을 올렸다.
'오피스텔 투자'
검색어를 쳤다.
수많은 결과가 떴다.
"갭투자로 월세 받기" "3천만 원으로 시작하는 오피스텔 투자" "주택임대사업자 등록 방법" "월세 수익 계산기"
경자는 하나씩 클릭했다. 글을 읽었다. 모르는 단어가 많았다. 갭이 뭔지, LTV가 뭔지, DSR이 뭔지.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버스가 왔다. 경자는 올라타 빈 좌석에 앉았다. 창밖으로 저녁 거리가 흘러갔다. 하지만 경자의 눈은 휴대폰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버스가 덜컹거렸다. 경자는 손잡이를 더 꽉 쥐고 휴대폰 화면에 집중했다.
'전세를 끼고 사는 거구나. 그럼 내 돈이 적게 들어가고... 나중에 월세로 전환하면 돈이 들어오고...'
조각조각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버스가 정류장에 섰다. 경자가 내릴 곳이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내렸다. 차가운 저녁 바람이 불었다.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관등을 켰다. 집 안은 조용했다. 남편은 아직 퇴근 전이었고, 막내딸 수진이는 학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경자는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었다.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다시 휴대폰을 꺼냈다.
소파에 앉았다. 검색을 계속했다.
저녁 7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막내딸 수진이 돌아왔다.
"엄마, 나 왔어요."
"응, 왔구나."
경자는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내렸다. 수진이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부엌을 들여다봤다.
"엄마, 밥은?"
"아... 미안. 지금 할게."
"괜찮아요. 제가 라면 끓여 먹을게요."
수진이가 냄비를 꺼냈다.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불을 켰다.
경자는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대학교 1학년. 스물한 살. 한창 돈이 들어갈 나이.
'등록금, 생활비... 이번 달도 빠듯해...'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취직했지만 여전히 손이 갔다. 전세 보증금 조금씩 보태주고, 학자금 대출 갚는 데 도와주고. 막내딸 수진이는 아직 대학생이라 등록금에 생활비까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수진이가 라면을 끓이는 동안 경자는 다시 휴대폰을 켰다. 이번엔 다른 앱을 열었다.
네이버 부동산.
다운로드 버튼을 눌렀다.
진행 바가 천천히 올라갔다. 10%... 30%... 50%...
뭔가 중요한 일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100%. 설치 완료.
앱을 열었다.
화면에 수많은 매물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아파트, 오피스텔, 빌라.
숫자들이 보였다.
'2억 2천... 전세 1억 9천... 갭 3천...'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어디가 서울이고 어디가 경기도인지도 분간이 안 됐다. 매매가가 뭐고 전세가가 뭔지도 헷갈렸다.
하지만 하나씩 클릭하며 보기 시작했다.
매물 사진. 작은 원룸들. 창문 밖 풍경들.
"엄마, 라면 먹어요?"
수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괜찮아. 너 먹어."
경자는 대답하고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밤 8시.
휴대폰이 울렸다. 큰아들이었다.
경자는 전화를 받았다.
"응, 현우야."
"엄마."
아들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무슨 일 있어?"
"...집주인이 전세금 올려달래요."
경자의 손이 멈췄다.
"얼마?"
"2천만 원이요."
"2천...?"
"네. 주변 시세가 다 올랐다고... 안 올려주면 나가달래요."
경자는 숨을 삼켰다.
"...엄마, 어떡하죠? 대출도 이미 한계인데..."
"...얼마나 시간 있어?"
"다음 달 초까지요. 한 달 정도..."
전화를 끊고 나서 경자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2천만 원.
어디서 구하지?
밤 10시.
남편 김정수가 퇴근했다. 현관문이 열렸다. 피곤한 얼굴로 들어왔다.
"다녀왔어."
"응, 수고했어. 밥 먹었어?"
"회사에서 먹었어."
정수는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TV 리모컨을 들었다. 뉴스가 나왔다.
"...부동산 시장이 연일 뜨거운 열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올해 전국 주택 매매가격이 9.9% 상승하며 200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는데요..."
경자의 귀가 쫑긋했다.
화면에 오피스텔 현장이 나왔다. 분양 상담을 받는 사람들. 모델하우스를 둘러보는 사람들.
"특히 수도권 오피스텔의 경우 아파트 대체재로 각광받으며 청약 경쟁률이 1,000대 1을 넘는 곳도 속출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초저금리 상황이 계속되면서 부동산 투자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나왔다. 40대 여자.
"전세금을 끼고 사면 내 돈이 많이 안 들잖아요. 나중에 월세로 전환하면 노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정수가 코웃음을 쳤다.
"쯧... 다들 미쳤나. 빚내서 집 사고."
경자는 아무 말 없이 TV를 바라봤다.
"당신, 이런 거 관심 있어?"
정수가 경자를 돌아봤다.
"...아니, 그냥..."
"우리 형편에 무슨 투자야. 조용히 사는 게 제일이야."
경자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조용히 산다고 해결돼? 현우 전세금은 어떻게 하는데?'
채널이 바뀌었다. 정수가 드라마를 틀었다.
경자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을 켰다.
다시 부동산 앱을 열었다.
매물들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다.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났다.
경자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침 출근길 버스 안에서 부동산 앱을 켰다. 여의도, 마포, 영등포... 매물을 검색했다. 점심시간 휴게실에서 동료들이 드라마 얘기를 할 때도 경자는 구석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어느 날 점심시간.
TV에서 또 뉴스가 나왔다.
"...소비자 물가가 전년 대비 3.7% 상승했습니다. 특히 식료품 가격이 5.2% 올라..."
화면에 장을 보는 사람들이 나왔다.
"라면 한 봉지에 천 원이 넘어가니까 부담스럽죠. 식용유도 만 원 가까이 하고..."
미숙이가 컵라면을 먹으며 말했다.
"진짜 미쳤어요. 이 컵라면도 지난달엔 900원이었는데 이제 1,200원이에요."
정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남자친구가요, 회사에서 월급 동결됐대요. 물가는 오르는데 월급은 안 올라서 실질적으로는 깎인 거죠."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올해 임금 인상률이 고작 2%래요. 물가는 3%씩 오르는데..."
경자는 그 대화를 들으며 도시락을 먹었다. 김밥 한 줄. 어제도 김밥, 그제도 김밥.
'돈을 아껴야 해. 현우 전세금도 도와줘야 하고...'
퇴근 후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설거지를 하면서도, 빨래를 개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숫자였다.
'2억 2천에 전세 1억 9천... 갭 3천... 취득세가 얼마지...'
밤 11시. 남편이 먼저 잤다. 경자는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켰다.
유튜브.
'부동산 투자' 검색.
수많은 영상이 떴다. 경자는 첫 번째 영상을 클릭했다. 40대 남자가 화면에 나왔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2022년 부동산 시장 전망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자는 소리를 줄이고 이어폰을 꼈다.
"현재 금리 인상 우려가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수도권 부동산은 여전히 상승세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경자는 메모장을 켰다. 중요한 부분을 적었다.
장기적으로 상승
수도권 유망
영상은 22분이었다. 다 봤다. 다음 영상을 클릭했다. "초보자를 위한 갭투자 가이드". 이것도 봤다. 그다음 영상도 봤다.
새벽 1시가 넘어갔다.
12월이 되었다.
날씨는 추워졌다. 경자는 아침마다 보일러를 켰다가 출근 전에 껐다. 난방비가 걱정되었다.
어느 날 우편함에서 고지서를 꺼냈다. 가스 요금. 눈을 의심했다.
'18만 원?'
지난달은 12만 원이었다. 6만 원이 올랐다.
경자는 한숨을 쉬었다.
집 안으로 들어와 남편에게 고지서를 보여줬다.
"여보, 이거 봐. 가스비가..."
남편이 고지서를 받아 봤다.
"18만 원? 이게 뭐야..."
"추워서 보일러 좀 틀었더니..."
"당신, 아끼라고 했잖아. 이러다 거지 되겠어."
경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부터 경자는 보일러를 더 조심히 켰다. 외출할 때는 물론이고, 낮에도 최대한 끄고 지냈다.
집 안이 추웠다. 경자는 두꺼운 잠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담요를 덮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연말이 왔다.
TV에서 연말 결산 뉴스가 나왔다.
"2021년 한 해, 서민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습니다. 물가는 올랐지만 소득은 제자리걸음을 했고..."
화면에 시장 풍경이 나왔다. 채소 가격표.
"배추 한 포기 8,000원, 무 한 개 5,000원... 작년 이맘때보다 30% 가까이 올랐습니다."
인터뷰. 60대 할머니.
"장을 보는데 돈이 모자라요. 이것저것 빼고 사도 5만 원이 훌쩍 넘어가요."
경자는 그 화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뉴스는 계속 이어졌다.
"전세난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올해 전세 가격은 평균 6.5% 상승했고, 일부 지역은 10% 이상 올랐습니다."
"한 30대 직장인은 '전세 계약 갱신을 앞두고 집주인이 5천만 원을 올려달라고 했다. 결국 월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경자는 큰아들 현우 생각이 났다.
'2천만 원... 아직 해결 못 했는데...'
남편이 물었다.
"요즘 뭐 그렇게 휴대폰만 봐?"
경자는 화들짝 놀라 화면을 내렸다.
"...아니, 그냥."
"부동산 보는 거야?"
남편의 목소리에 의심이 섞여 있었다.
"아니야. 그냥... 뉴스 보는 거야."
"뉴스? 매일 밤 11시 넘어서까지?"
경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남편은 잠시 경자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당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우리 형편에 무슨 투자야."
"...응."
"돈 있어야 투자도 하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냥 조용히 사는 게 제일이야."
남편은 TV 채널을 돌렸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경자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생각했다.
'그래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해? 아무것도 안 하고? 현우 전세금은 어떻게 하고? 수진이 등록금은? 우리 노후는?'
그날 밤, 남편이 잠든 후, 경자는 다시 휴대폰을 켰다.
거실 소파에 앉아 스탠드만 켰다. 계산기 앱을 열었다.
여의도 오피스텔 10평. 매매가 2억 2천만 원. 전세 1억 9천.
계산을 시작했다.
매매가: 2억 2천만 원
전세금: 1억 9천만 원 (임차인이 넣음)
갭: 3천만 원
취득세(4.6%): 1,012만 원
중개수수료(매매): 80만 원
중개수수료(전세): 60만 원
법무사비: 70만 원
전세보증보험료: 60~70만 원
기타 비용: 약 200만 원
총 필요자금: 3,000만 원 + 1,500만 원 = 4,500만 원
경자가 가진 돈: 1,000만 원
부족한 돈: 3,500만 원
'신용대출로 3,500만 원을 받으면... 이자 14%면 월 40만 원 정도...'
계산을 이어갔다.
처음 2년: 전세 (월세 수입 0원, 이자만 40만 원 지출)
3-4년차: 월세 10만 원 (이자 빼면 -30만 원)
5-6년차: 월세 20만 원 (이자 빼면 -20만 원)
7-8년차: 월세 30만 원 (이자 빼면 -10만 원)
...
15년 후쯤: 월세 80만 원 (이자 빼면 +40만 원)
'15년... 그때 내가 67살이네...'
경자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손주들 용돈 줄 수 있고, 자식들 눈치 안 봐도 되고, 남편한테 손 안 벌려도 되는 그날.
경자는 그 미래를 그렸다.
며칠 후, 또 밤이었다.
남편이 침실에서 나와 거실로 왔다. 경자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또 그거 봐?"
"...응."
"당신, 정말 집 사려고?"
경자는 고개를 들었다. 남편의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생각 중이야."
"돈은 어디서 구하려고?"
"...신용대출 받으면 돼."
남편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 미쳤어? 신용대출 이자가 얼만데. 그거 갚으려면 우리 죽어."
"근데 나중엔 월세 받잖아. 노후 준비할 수 있어."
"나중은 나중 얘기고, 지금 당장 이자 갚을 돈은 어디 있어?"
경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남편은 소파에 앉았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 우리 형편 알잖아. 아이들 뒷바라지에, 생활비에... 현우 전세금도 도와줘야 하는데 어디 여유가 있어? 괜히 무리하다가 다 망가져."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면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해."
"이렇게 사는 게 뭐가 문제야? 조용히 애들 키우고, 정년까지 일하고, 연금 받으면서 살면 되지."
경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연금으로 우리 둘이 어떻게 살아? 병원비도 나가고, 물가도 오르는데. 그리고 현우 전세금은? 2천만 원 어떻게 구해?"
남편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그건 내가 알아볼게. 당신은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쓸데없는 생각?"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근데 나중에 후회하지 마."
침실로 들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경자는 혼자 남았다. 가슴 한구석이 서운했다. 왜 남편은 이해하지 못할까. 경자도 두렵다. 하지만 더 두려운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 늙어가는 거였다.
'후회... 나중에 후회하는 건 지금 아무것도 안 하는 거 아닐까?'
경자는 휴대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불을 끄고 이불을 덮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 화면만 밝게 빛났다.
새해가 밝았다. 2022년 1월.
경자의 결심은 더 단단해졌다.
'올해는 진짜 해야 해.'
거실 시계가 새벽 3시를 가리켰다. 경자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봤다.
'시작했다. 이제 멈출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