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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5%의 덫, Ep 3

2장 2화 - 공부의 시간

by Selly 정

"조금 아는 것이 전혀 모르는 것보다 위험하다" - 알렉산더 포프 (Alexander Pope), 영국 시인


겨울이 깊어졌다.

새벽 2시.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벽을 타고 흘러왔다. 드르렁. 드르렁. 규칙적이었다. 15년을 들어온 소리. 경자는 숨을 죽이고 이불을 걷었다. 천천히. 소리가 나지 않게.

발이 마룻바닥에 닿았다. 차가웠다. 소름이 돋았다.

거실로 나왔다. 보일러는 18도. 그것도 아까워서 17도로 낮춰뒀다. 숨을 내쉬면 입김이 보일 것 같았다. 양말을 두 겹 신었다.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소파에 앉았다.

휴대폰을 켰다.

화면 불빛이 얼굴을 비췄다. 유튜브. 검색창에 글자를 쳤다. '부동산 투자 기초'. 손가락이 떨렸다. 추워서인지, 긴장해서인지.

영상이 떴다. 조회수 87만. 썸네일에 40대 남자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부동산 왕초보를 위한 기초 강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목소리가 또렷했다. 경자는 볼륨을 낮췄다. 남편이 깰까 봐.

"부동산은 크게 주거용과 상업용으로 나뉩니다."

경자는 메모장을 열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주거용. 상업용.

"주거용은 아파트, 오피스텔, 빌라, 주상복합이 있고요."

뭐가 이렇게 많아. 경자는 멈췄다. 아파트는 안다. 오피스텔도 안다. 근데 주상복합은 뭐지? 빌라랑 아파트는 뭐가 달라?

영상을 멈췄다. 검색했다. '주상복합 뜻'. 읽었다. 다시 영상으로 돌아왔다. 재생.

"상업용은 상가, 지식산업센터 등이 있습니다."

지식산업센터? 그건 또 뭐야.

멈췄다. 검색했다. 읽었다. 돌아왔다. 재생.

20분짜리 영상이었다. 경자는 2시간 동안 그 영상을 봤다.

시계를 봤다. 새벽 4시.

눈이 따가웠다. 어깨가 뻣뻣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주거용, 상업용, 아파트, 오피스텔, 빌라, 주상복합, 상가, 지식산업센터.

외워야 해. 알아야 해.

경자는 다음 영상을 눌렀다.

그다음 날 밤도 경자는 거실에 앉았다.

이번엔 아파트 영상이었다.

화면 속 남자가 말했다. "아파트는 가장 안정적인 투자처입니다. 하지만 진입장벽이 높죠."

진입장벽. 그게 뭔데.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가 12억입니다."

경자는 숨이 막혔다.

12억.

웃음이 나왔다. 헛웃음이었다. 12억이면 내가 몇 년을 일해야 하지? 마트 월급이 180만 원. 남편 월급 합쳐서 400만 원. 1년에 5천만 원도 못 모은다. 세금 떼고, 생활비 쓰고, 애들 용돈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

12억.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평생 일해도 안 된다.

경자는 영상을 껐다.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봤다.

아파트는 안 되는구나.

그다음 날은 빌라 영상을 봤다.

"빌라는 아파트보다 저렴합니다."

경자의 귀가 쫑긋했다. 저렴하다고?

"하지만 주의하세요. 환금성이 떨어지고, 전세 사기 위험이 있습니다."

전세 사기. 경자는 그 단어에서 멈췄다. 뉴스에서 봤다. 빌라 전세 사기. 깡통 전세. 보증금 날린 사람들. 울부짖는 사람들.

무서웠다.

경자는 메모했다. 빌라: 저렴, 전세 사기 주의.

그다음 날은 주상복합.

"주상복합은 역세권에 많습니다. 하지만 관리비가 비싸요. 월 30만 원 넘는 곳도 있습니다."

30만 원? 관리비만?

경자는 계산했다. 1년이면 360만 원. 그 돈이면...

고개를 저었다. 주상복합: 관리비 비쌈.

그다음 날은 오피스텔.

"오피스텔은 1인 가구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소액으로 투자 가능하죠."

소액.

경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전세가율이 높아서, 적은 돈으로 살 수 있습니다."

적은 돈. 소액. 그 단어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얼마인데? 얼마면 되는 건데?

그다음 날은 상가.

"상가는 월세 수익이 안정적입니다. 하지만 공실 위험이 커요. 세입자가 나가면 몇 달, 몇 년 비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실. 텅 빈 상가. 월세 0원.

경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니다.

상가: 월세 수익, 공실 위험.

겨울 내내 경자는 그렇게 살았다.

낮에는 마트에서 바코드를 찍었다. 삐— 삐— 손가락이 기계처럼 움직였다. 머릿속은 딴 데 가 있었다. 아파트, 빌라, 오피스텔. 전세가율, 갭투자, 레버리지.

밤에는 거실에서 공부했다. 보일러를 끈 채로. 담요를 덮고. 손끝이 시린 채로.

어느 날 저녁, 우편함에서 전기 요금 고지서를 꺼냈다. 지난달보다 4만 원이 올랐다.

"여보, 전기세가..."

"또 올랐어?"

남편이 한숨을 쉬었다. "겨울만 되면 이거야. 보일러 좀 아껴 써."

경자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 17도로 낮춰놨는데. 더 어떻게 아껴.

"추우면 옷을 더 입어. 돈이 얼마나 나가는데."

그날 밤부터 경자는 보일러를 껐다. 완전히. 잠옷 위에 패딩을 입고 잤다. 양말을 세 겹 신었다. 손이 곱았다. 발이 시렸다.

하지만 휴대폰은 내려놓지 않았다.

새벽 2시. 거실 소파. 담요 속에서 화면이 빛났다.

영상 속 50대 여자가 말했다. 경자와 비슷한 나이. 단정한 인상.

"저는 3년 전에 오피스텔 하나로 시작했어요. 지금은 3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3채.

경자는 숨을 멈췄다. 저 사람도 50대다. 저 사람도 나처럼 시작했다. 저 사람이 됐으면 나도...

"중요한 건 입지입니다. 역세권. 수요가 있는 곳. 그리고 소액으로 시작하세요."

소액.

그 단어가 또 나왔다.

경자는 메모했다. 소액 투자. 오피스텔. 역세권.

어느 토요일, 경자는 서점에 갔다.

남편에게는 마트 갔다 온다고 했다.

서점 2층.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렸다. 경제경영 코너를 찾았다. 부동산 책들이 한 섹션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십 권. 표지마다 화려한 글씨.

'월급쟁이 부자 되는 법' '나는 부동산으로 100억을 벌었다' '아파트 투자의 정석' '빌라로 시작하는 내 집 마련' '오피스텔 투자 바이블' '상가 투자, 이것만 알면 된다'

경자는 한 권씩 집어 들었다. 페이지를 넘겼다. 어떤 책은 아파트만 다뤘다. 12억, 15억, 20억. 숫자만 봐도 한숨이 나왔다. 어떤 책은 빌라를 다뤘다. 전세 사기 주의, 깡통 전세 주의. 겁이 났다.

오피스텔 책을 집어 들었다. '부린이를 위한 부동산 투자'. 표지가 친근했다. 페이지를 넘겼다. 그림이 많았다. 글씨가 컸다.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았다.

가격을 봤다. 18,000원.

한 달 용돈이 4만 원이었다. 절반이었다.

경자는 책을 내려놓았다. 다른 책을 봤다. 다시 그 책을 집어 들었다. 내려놓았다. 집어 들었다.

결국 계산대로 갔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책을 펼쳤다. 형광펜을 꺼냈다. 중요한 문장에 줄을 그었다.

"투자금이 적다면 갭투자를 고려하세요."

갭투자. 카페에서 본 단어. 영상에서 들은 단어.

"갭투자란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것입니다. 매매가와 전세가의 차이, 즉 '갭'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경자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갭만큼만 있으면 된다. 그러니까... 집값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다음 페이지.

"하지만 주의하세요. 전세가가 하락하면 손실을 볼 수 있고, 공실이 생기면 대출 이자를 혼자 감당해야 합니다."

경자는 멈췄다. 형광펜을 든 손이 멈췄다.

위험.

그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전세가 하락. 공실. 대출 이자.

노트에 적었다.

위험 1: 전세가 하락 위험 2: 공실 위험 3: 대출 이자 부담

하지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투자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수도권 부동산은 상승해왔습니다."

그래프가 나왔다. 20년간 서울 집값 추이. 선이 오른쪽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꺾이지 않고. 계속.

경자는 그 그래프를 오래 바라봤다.

위험에 대한 문장은 희미해졌다. 오르는 선만 눈에 남았다.

결국 오르는구나.


봄이 왔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 경자는 버스 창밖을 봤다. 가로수에 연두색 새싹이 돋아 있었다.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분홍색 꽃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경자는 그걸 제대로 보지 못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민준'이 떴다. 큰아들.

"여보세요?"

"엄마..."

목소리가 어두웠다. 경자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 무슨 일이야?"

"...집주인이 나가래요."

"뭐?"

"계약 연장 안 한대요. 2천만 원 올려주면 연장하겠다는데, 저희가 못 올려준다고 했잖아요."

경자는 눈을 감았다. 2년 전에 민준이네 전세 보증금 보태준다고 천만 원 보냈다. 그것도 쪼개고 쪼개서 모은 돈이었다. 또 2천만 원을 어디서.

"그럼... 어떻게 하려고?"

"월세로 알아보고 있어요."

"월세?"

"보증금 1천에 월세 70만 원 정도요."

70만 원.

경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 엄마?"

"...응. 들었어."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전화가 끊겼다.

경자는 버스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70만 원. 한 달에. 민준이 월급이 세후 280만 원이라고 했다. 거기서 70만 원이 나가면. 210만 원. 거기서 밥 먹고, 교통비 내고, 폰 요금 내고. 남는 게 뭐가 있어.

뉴스에서 봤다. 전세 대란. 집주인들이 전세를 월세로 바꾸고 있다고. 전셋값이 2년 새 30% 올랐다고.

그게 남의 일인 줄 알았다.

내 아들 이야기인 줄 몰랐다.

그날 밤, 경자는 잠을 잘 수 없었다.

거실 소파에 앉았다. 담요도 덮지 않았다. 봄이라 그나마 덜 추웠다.

휴대폰을 켰다. 네이버 부동산 앱을 열었다.

아파트. 서울. 검색.

매물이 떴다. 10억. 12억. 15억. 한숨이 나왔다. 꿈도 못 꾼다.

빌라. 검색.

저렴한 매물이 있었다. 2억, 3억. 하지만 뉴스에서 본 게 떠올랐다. 빌라 전세 사기. 깡통 전세. 무서웠다.

오피스텔. 검색.

가격이 다양했다. 2억부터 5억까지.

경자는 지역을 바꿔가며 검색했다.

강남구. 3억, 4억, 5억. 화면을 보다가 꺼버렸다. 말도 안 돼.

서초구. 비슷했다. 3억 후반.

마포구. 조금 저렴했다. 2억 후반, 3억대.

영등포구. 더 저렴했다. 2억대. 눈이 갔다.

경자는 영등포구 매물을 하나씩 클릭했다. 사진을 봤다. 위치를 확인했다. 전세가를 확인했다.

어떤 매물은 매매가 2억 5천에 전세가 1억 8천이었다. 갭이 7천.

어떤 매물은 매매가 2억 3천에 전세가 2억이었다. 갭이 3천.

3천.

경자는 그 숫자에서 멈췄다.

3천이면... 내가 가진 돈으로 될까?

휴게실. 점심시간.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가 12억 원을 돌파했습니다."

미숙이가 말했다. "언니, 요즘 뭐 보세요? 부동산?"

"...응. 이것저것."

"뭐 살 거예요? 아파트요?"

경자는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아파트가 12억인데 내가 뭘."

"그럼 뭐요?"

"몰라. 아직."

정주가 거들었다. "오피스텔 어때요? 제 언니가 오피스텔 샀는데, 괜찮대요."

"어디?"

"마포요. 작년에 샀는데 벌써 3천 올랐대요."

3천.

경자의 귀가 쫑긋했다.

"전세 끼고 사면 돈이 얼마 안 든대요. 3천? 4천? 그 정도면 된대요."

3천. 4천. 그 숫자가 머릿속에 박혔다.

미숙이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 남편이요, 회사에서 희망퇴직 대상이래요."

"진짜?"

"53살인데... 어디서 다시 뽑아주겠어요."

미숙이의 눈이 붉어졌다.

경자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속으로는 무서웠다.

우리 남편도 정년까지 5년.

민준이는 월세 70만 원.

둘째 재혁이는 학자금 대출.

막내 수빈이는 아직 대학생.

뭔가 해야 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여름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폭염이 서울을 덮었다. 아스팔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버스 안은 찜통이었다. 에어컨이 나오긴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TV에서 뉴스가 나왔다.

"물가 상승률이 6%를 기록했습니다. 24년 만에 최고치입니다."

"휘발유 가격이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마트 계산대에서 손님들이 한숨을 쉬었다.

"장 보는 게 무서워요. 라면이 왜 이렇게 올랐어요?"

경자는 영수증을 건넸다. 나도 무서워요. 말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가면 지옥이었다. 에어컨을 켜고 싶었다. 하지만 전기세가 두려웠다. 선풍기만 틀었다. 밤에도 더웠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어느 날 전기 요금 고지서가 왔다. 지난달보다 7만 원이 올랐다.

남편이 고지서를 보며 말했다. "에어컨 틀었어?"

"아니. 선풍기만."

"선풍기만 틀었는데 이게 말이 돼?"

말이 안 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기 요금이 올랐다고 뉴스에서 봤다.

그날 밤, 경자는 선풍기도 껐다. 더웠다. 땀이 흘렀다. 하지만 참았다.

새벽 2시. 거실 소파. 더위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어차피 못 자는 거. 경자는 휴대폰을 켰다.

부동산 카페에 접속했다. 질문을 올렸다.

"50대 초보입니다. 투자금이 5천만 원 정도인데, 뭘 사야 할까요?"

새벽인데도 댓글이 달렸다. 나 같은 사람이 많구나.

"5천이면 아파트는 힘들어요." "빌라는 요즘 전세 사기 많아서 비추." "오피스텔 갭투자 알아보세요. 3천이면 가능한 데도 있어요."

오피스텔. 갭투자. 3천.

자꾸 그 단어들이 나왔다.

어느 토요일 오후.

경자는 남편에게 거짓말을 했다.

"여보, 오늘 친구 만나고 올게."

"누구?"

"옛날 동창.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어."

남편은 TV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다녀와."

경자는 현관문을 나섰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하철을 탔다. 강남역까지 40분. 차 안은 시원했지만 긴장돼서 땀이 났다.

세미나. 생애 처음 가보는 부동산 세미나.

세미나장은 작은 빌딩 3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30명쯤. 경자는 흠칫 놀랐다. 나이가 다양했다. 30대처럼 보이는 청년도 있었고, 60대처럼 보이는 노인도 있었다. 양복 입은 남자도 있었고, 경자처럼 수수한 차림의 중년 여자도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이 있구나.

경자는 뒤쪽 자리에 앉았다. 노트를 꺼냈다. 이미 반쯤 채워진 노트. 겨울부터 혼자 공부한 흔적들.

강사가 들어왔다. 50대 남자.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

"안녕하세요. 부동산 전문가 이재훈입니다."

강의가 시작됐다.

"요즘 금리 인상 때문에 투자를 망설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경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하지만요."

강사가 웃었다.

"이럴 때가 오히려 기회입니다."

경자는 펜을 들었다.

금리 인상기 = 기회

"남들이 무서워할 때. 남들이 망설일 때. 그때 사는 겁니다."

경자는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별표를 쳤다.

강의는 2시간 동안 이어졌다. 경자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노트가 빼곡해졌다.

강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일어났다. 경자도 일어나려는데, 옆에 앉았던 50대 여자가 말을 걸었다.

"혼자 오셨어요?"

"네."

"저도요."

그 여자가 웃었다. "남편 몰래 왔어요. 말하면 잔소리하거든요."

경자도 웃었다. "저도요."

두 사람은 잠깐 눈을 마주쳤다. 동지 같았다.

쌀쌀한 가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낙엽이 지기 시작했다.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TV에서 뉴스가 나왔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또 올렸습니다. 올해 들어 다섯 번째입니다."

경자는 불안해졌다. 금리가 계속 오르면 대출 이자도 올라가는 거잖아.

휴게실에서 미숙이가 한숨을 쉬었다.

"언니, 저희 남편이요... 결국 희망퇴직했어요."

"진짜?"

"퇴직금 받아서 당분간 버티려고요. 근데 재취업이 쉽지 않대요. 나이가 많다고 안 뽑아줘요."

미숙이의 눈이 붉어졌다. 경자는 미숙이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경자는 본격적으로 매물을 찾기 시작했다.

네이버 부동산 앱. 직방. 다방. 매일 밤 세 개의 앱을 번갈아 열었다.

강남구. 너무 비쌌다. 패스.

서초구. 비슷했다. 패스.

마포구. 좀 나았지만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영등포구. 눈에 들어왔다.

여의도. 영등포구인데 직장인이 많다고 했다. 전세 수요가 있다고 했다.

경자는 여의도 오피스텔을 검색했다. 수십 개의 매물이 떴다. 하나씩 클릭했다.

매매 2억 5천, 전세 2억 2천. 갭 3천.

매매 2억 3천, 전세 2억. 갭 3천.

매매 2억 2천, 전세 1억 9천. 갭 3천.

경자는 노트에 적었다. 매물마다 계산했다. 취득세. 중개수수료. 법무사비. 보증보험료.

둘째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학자금 대출 독촉이 왔어요."

"얼마나 남았어?"

"천만 원 넘게요. 매달 갚고 있긴 한데, 이자가 계속 붙어서..."

경자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조금 도와줄게."

"엄마, 미안해요."

전화를 끊고 통장을 확인했다. 천만 원 조금 넘게 있었다. 아들한테 보내주면 거의 안 남는다.

경자는 두 번째 세미나에 참석했다. 이번엔 부산. KTX로 2시간 반.

남편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부산까지? 무슨 친구가 부산에 있어?"

"대학 동기.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어."

"요즘 너 뭐 하는 거야? 자꾸 나가고."

경자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들켰나?

"아니야. 그냥 친구들이 만나자고 해서..."

남편은 한참 경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다녀와."

부산 세미나장에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경자는 놀랐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에 관심이 있구나.

강사가 말했다.

"여러분, 지금 시장이 어렵습니다. 금리가 오르고, 집값이 조정받고 있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럴 때가 기회입니다. 남들이 두려워할 때 사야 합니다."

경자는 메모했다. 남들이 두려워할 때 = 기회

가을이 깊어갔다.

휴게실에서 미숙이가 물었다.

"언니, 요즘 집값 어때요? 좀 떨어졌대요."

경자가 대답했다.

"조정기야. 금리 인상 영향이지. 하지만 수도권 핵심 입지는 괜찮을 거야."

미숙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언니 완전 전문가 같아요."

경자는 웃었다. 1년이었다. 겨울부터 공부했다. 이제 용어들이 익숙했다. LTV, DTI, DSR, 전세가율, 갭투자, 역전세. 그 단어들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경자는 매물을 검색하다가 멈췄다.

여의도 오피스텔 10평 매매가: 2억 2천만 원 전세: 1억 9천만 원 갭: 3천만 원

사진을 클릭했다. 작은 원룸이었다. 깨끗했다. 창문이 있었다. 창밖으로... 뭔가 보였다. 건물들 사이로. 아주 멀리. 희미하게.

한강?

경자는 화면을 확대했다. 손가락으로 늘렸다. 건물들 사이로 파란 띠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한강뷰라고 할 수 있나?

모르겠다. 하지만 가슴이 뛰었다.

전세가율을 계산했다. 1억 9천 나누기 2억 2천. 86%. 강의에서 들은 기준 80%를 넘겼다. 좋았다.

필요 자금을 계산했다. 갭 3천만 원. 취득세, 중개수수료, 법무사비, 보증보험료. 대략 4,500만 원.

경자는 통장 잔고를 떠올렸다. 1천만 원 조금 넘게 있었다. 둘째한테 보내주면 거의 없다.

4,500만 원. 어디서 구하지?

신용대출?

경자는 중개사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며칠이 지났다.

경자는 매일 그 매물을 확인했다. 아직 있었다. 팔리지 않았다.

'빨리 연락해야 하나...'

하지만 망설여졌다. 남편한테 뭐라고 말하지?

휴게실에서 미숙이가 말했다.

"언니, 너무 오래 고민하면 기회 놓쳐요."

"응?"

"우리 엄마 친구분이 그러는데, 작년에 봤던 집이 지금은 5천 올랐대요. 그때 샀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한대요."

후회.

그 단어가 경자의 가슴에 박혔다.

5천. 1년에 5천. 내가 3년 일해도 못 모으는 돈. 집 하나 샀으면 1년 만에.


겨울이 다시 왔다.

첫눈이 내렸다. 하얀 눈이 세상을 덮었다.

1년이 지나 있었다.

경자는 1년 동안 공부했다. 유튜브를 보고, 책을 읽고, 카페를 돌아다니고, 세미나를 다녔다. 아파트, 빌라, 주상복합, 오피스텔, 상가. 강남, 서초, 마포, 영등포, 여의도. 다 찾아봤다. 다 계산해봤다.

아파트는 12억. 꿈도 못 꾼다.

빌라는 전세 사기가 무섭다.

주상복합은 관리비가 너무 비싸다.

상가는 공실이 무섭다.

남는 건 오피스텔. 그것도 갭투자. 전세 끼고 사는 거.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거.

여의도. 직장인이 많아서 전세 수요가 있는 곳.

전세가율 86%. 갭 3천.

어느 날 밤. 남편이 잠든 후.

경자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휴대폰을 켰다. 저장해둔 매물을 다시 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거다. 이게 내 기회야.'

중개사 번호를 눌렀다. 문자를 썼다.

"안녕하세요. 매물 문의 드립니다. 내일 시간 되시나요?"

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에서 멈췄다.

'진짜 보낼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1년이었다. 1년 동안 공부했다. 전세가율이 뭔지 안다. 갭투자가 뭔지 안다. 취득세가 얼마인지 안다. 위험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남편 설득은 나중 일이야. 일단 좋은 매물이면 놓칠 수 없어.'

미숙이 말이 떠올랐다. 후회. 작년에 샀으면 5천 올랐는데.

정주 말이 떠올랐다. 언니 오피스텔 3천 올랐대요.

세미나 강사 말이 떠올랐다. 남들이 두려워할 때가 기회입니다.

유튜브 영상 속 50대 여자 말이 떠올랐다. 저도 3년 전에 하나로 시작했어요. 지금은 3채예요.

'모두가 하고 있는데. 나만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민준이 월세 70만 원. 민수 학자금 대출. 수빈이 등록금.'

'남편 정년까지 5년. 그 후에는?'

'이대로 늙으면 어떻게 되지?'

경자는 눈을 감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눌렀다.

전송.

메시지가 날아갔다.

경자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봤다.

'시작했다.'

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고요했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경자는 보지 못했다.

거실 시계가 새벽 3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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