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운명적 결정
"모두가 두려워할 때가 투자의 기회다." - 워렌 버핏
다음 날 아침은 쌀쌀했다.
경자는 외투를 한 겹 더 걸쳤다. 옷장에서 꺼낸 회색 패딩. 작년에 마트 세일 때 산 것. 소매 끝이 조금 해져 있었지만 아직 입을 만했다. 새 옷을 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돈이면 만 오천 원. 통장에 넣으면 이자라도 붙는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잎. 10월 끝자락의 아침.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할 계절이겠지만, 경자에게 가을은 늘 쓸쓸했다. 무언가 끝나가는 느낌. 시간이 흘러간다는 느낌. 한 해가 또 저물어간다는 느낌.
버스 정류장. 이미 몇 명이 서 있었다. 출근하는 직장인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무표정하게 멍하니 서 있거나. 모두 자신의 세계 안에 있었다.
경자도 휴대폰을 꺼냈다. 어젯밤 새벽 3시 15분에 보낸 그 문자. 화면을 켜서 다시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매물 문의 드립니다. 내일 시간 되시나요?"
아직 답장은 없었다.
'혹시 중개사가 아직 안 봤을까? 아니면 바쁜 걸까? 혹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걸까?'
가슴이 조금 답답했다. 불안했다. 그러면서도 기대가 있었다.
버스가 왔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우르르 탔다. 경자도 탔다.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플라스틱 손잡이의 차가운 감촉.
창밖으로 출근길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편의점 불빛. 빵집에서 나오는 사람들. 횡단보도를 건너는 학생들. 모두 바빴다. 모두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 자기 삶을 살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슈퍼마켓까지는 두 블록. 익숙한 길이었다. 십이 년을 걸어온 길. 어느 가게가 몇 시에 불을 켜는지, 어느 모퉁이에서 담배 냄새가 나는지, 어느 골목에서 고양이가 나타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슈퍼마켓 직원 입구. 낡은 철문.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락커룸. 형광등 불빛. 하얀 빛이 눈이 부셨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파란색 조끼. 가슴에 이름표 '서경자'. 십이 년 동안 달고 다닌 이름표. 플라스틱이 낡아서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여러 번 새 걸로 바꾸자고 했지만 귀찮아서 그냥 쓰고 있었다.
거울을 봤다. 오십대 중반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눈가 주름. 입가 주름. 이마 주름. 어제보다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은 주름들. 머리에 새치도 많이 섞여 있었다. 매달 염색약 사는 돈도 아까웠다. 요즘 염색약도 천 원씩 올랐다.
"경자 언니, 아침!"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동료 미숙이었다. 경자보다 다섯 살 어린, 십 년 지기 동료.
"응, 아침."
"언니 얼굴이 좀 피곤해 보이는데? 어젯밤에 잠 못 잤어?"
미숙이 경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아니, 괜찮아."
거짓말이었다. 실제로는 두세 시간밖에 못 잤다. 계속 뒤척였다. 매물 생각. 숫자 생각. 한강뷰 생각. 머릿속이 복잡했다.
락커룸을 나와 매장으로 들어갔다. 슈퍼마켓 특유의 냄새. 과일 냄새, 생선 냄새, 세제 냄새가 뒤섞인 그 냄새. 십이 년 동안 매일 맡은 냄새. 이젠 집 냄새처럼 익숙했다.
계산대 앞에 섰다. 1번 계산대. 경자의 자리. 십이 년 동안 서 있던 자리. 발밑 바닥의 고무 매트가 발 모양대로 패여 있었다.
아침부터 손님들이 몰려왔다. 주말 장을 보러 온 주부들. 카트를 끌고 왔다. 채소, 과일, 고기, 생선. 한가득 담았다. 출근길에 들른 직장인들도 있었다. 우유 한 팩, 빵 한 봉지. 손에는 스마트폰, 귀에는 이어폰. 모두 자신의 세계 안에 있었다.
"어서 오세요."
기계적으로 인사했다. 바코드를 찍었다. 삑. 삑. 삑. 기계적인 소리. 화면에 숫자가 떴다. 카드를 받았다. 리더기에 찍었다. 영수증이 나왔다. 건넸다.
손님 하나가 투덜거렸다.
"대파가 또 올랐네. 지난주에 천 원이던 게 천오백 원이야?"
"죄송합니다. 저희도 어쩔 수가 없어서요..."
경자는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요즘 매일 듣는 말이었다. 물가가 올랐다. 뉴스에서도 매일 나왔다. 물가 상승률 5%. 23년 만에 최고치. 라면도, 계란도, 채소도, 고기도. 모든 게 올랐다.
그러나 경자의 월급은 그대로였다. 120만 원. 십이 년 전 처음 입사했을 때 100만 원이었는데, 조금씩 올라서 120만 원.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실질적으로는 오히려 줄어든 것 같았다.
손님이 떠나고, 잠깐 한가해지자 경자는 생각에 잠겼다.
'여의도... 한강뷰... 갭 3천...'
그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주문처럼. 계속 반복되었다.
오전 11시쯤.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이 아니라 벨소리였다. 앞치마 주머니 안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경자는 깜짝 놀라 손을 멈췄다. 바코드를 찍다가 멈췄다.
손님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경자를 쳐다봤다. 중년 남자 손님. 무표정한 얼굴.
"죄, 죄송합니다!"
경자는 황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서울 지역번호였다. 02.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혹시...'
"미숙아! 잠깐만!"
옆 계산대의 미숙에게 급하게 손짓했다. 미숙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자 쪽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다음 계산대로..."
경자는 휴게실로 뛰어갔다. 뛰는 동안 슬리퍼가 발에서 벗겨질 뻔했다.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휴대폰을 보니 벨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이 미끄러져서 두 번 눌렀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마치 첫사랑에게 전화를 거는 십대 소녀처럼.
"여보세요? 영달공인중개사사무소입니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60대 초반쯤으로 들렸다. 목소리가 밝고 활기찼다. 친절했다. 자신감이 넘쳤다.
마치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은 톤.
경자는 그 목소리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냥 그랬다. 목소리가 주는 힘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게 시작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경자의 목소리가 한껏 올라갔다. 긴장과 반가움이 뒤섞여 있었다. 가슴이 요동쳤다.
"어젯밤에 문의 주신 거 봤어요. 여의도 오피스텔 말씀이시죠?"
"네, 맞아요!"
"조영달입니다. 조 소장이라고 부르셔도 되고요. 손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서경자입니다."
"아, 서경자 사모님! 반갑습니다!"
조영달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진짜 반가운 것처럼 들렸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경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사모님, 10평짜리 보신 거 맞죠? 2억 2천에 전세 1억 9천 나오는?"
"네, 맞아요!"
경자는 휴게실 탁자에 앉으며 숨을 고르려고 했다. 그러나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휴대폰을 쥔 손이 축축했다.
"아주 좋은 매물이에요, 정말!"
조영달의 목소리가 한층 더 밝아졌다. 마치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선물을 주는 것처럼.
"제가 이 일 한 지 이십 년 됐는데, 요즘 이런 조건 매물 정말 드뭅니다. 특히 요즘 같은 때는요."
"요즘 같은 때요?"
"아, 사모님은 아직 잘 모르시나 보네요."
조영달의 말투가 살짝 바뀌었다. 마치 선생님이 학생에게 가르쳐주듯이. 경자는 자신도 모르게 더 귀를 기울였다.
"금리가 계속 오르고 있잖아요. 한국은행에서 또 올렸어요, 어제. 뉴스 안 보셨어요?"
경자는 당황했다. 뉴스를 본 것 같기도 하고 안 본 것 같기도 했다. 요즘 머릿속이 복잡해서 뭘 봤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났다.
"그래서요, 사모님."
조영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귀한 정보를 주는 것처럼.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마지막 기회.
그 말이 경자의 가슴에 꽂혔다. 날카롭게. 깊이.
"금리가 더 오르면 매물도 더 싸게 나올 수 있지만, 대출 이자가 너무 높아져서 투자가 안 돼요. 지금 이 가격에 이 갭이면... 정말 좋은 조건이에요. 이런 기회는 다시 안 와요."
다시 안 온다.
경자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사모님, 투자 목적이시죠?"
"네, 그런데요..."
"잘하셨어요!"
조영달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마치 정답을 맞힌 학생을 칭찬하듯이.
"지금 여의도는 정말 괜찮은 지역이거든요. 직장인들 수요 많고요. 전세든 월세든 금방 나가요. 공실 걱정 없어요."
공실 걱정 없다.
그 말도 경자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일단 한번 보러 오세요. 실물 보시면 더 마음에 드실 거예요."
"정말요?"
"네! 사진으로는 잘 안 나왔는데, 실제로는 한강 잘 보여요. 10층이라 시야도 탁 트이고요. 날 좋은 날은 63빌딩까지 다 보여요. 야경은... 말로 못 해요. 직접 보셔야 해요."
한강. 63빌딩. 야경.
경자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넓은 창문. 반짝이는 한강. 서울의 야경. 그 모든 게 내 것이 될 수 있다면...
경자는 탁자 위에 놓인 펜을 집어들었다. 메모지도 있었다. 누군가 낙서한 메모지. 뒷면을 뒤집었다. 깨끗했다. 뭔가 적어야 할 것 같았다.
"언제 시간 되세요? 빨리 보시는 게 좋아요."
조영달의 목소리에 다시 긴박함이 섞였다.
"이런 매물은 금방 나가거든요. 작년 같았으면 벌써 나갔을 거예요. 요즘 시장이 좀 주춤하니까 이런 기회가 있는 거죠. 근데 이것도 언제까지일지..."
그 말에 경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금방 나간다고? 다른 사람들도 관심 있다는 건가?'
"이, 이번 주 토요일은 어때요?"
"완벽합니다! 토요일 오후 2시 어떠세요?"
"좋아요!"
"그럼 2시에 저희 사무소로 오세요. 여의도역 5번 출구로 나오시면 바로 보일 거예요.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릴게요. 사모님만을 위해서."
사모님만을 위해서.
그 말이 이상하게 기분 좋게 들렸다. 마치 VIP가 된 것 같은 느낌.
"네, 감사합니다!"
"참, 사모님. 혹시 다른 분들도 같이 오세요? 남편분이나 자녀분이나?"
경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 아뇨. 제가 혼자 갈게요."
"아, 그러세요?"
조영달의 목소리에 뭔가가 스쳤다. 만족? 안도? 경자는 잘 몰랐다.
"괜찮으세요? 이런 큰 결정은 보통 가족들이랑..."
"괜찮아요. 제가 먼저 보고 나중에 남편한테 말할게요."
"알겠습니다! 현명하신 거예요, 사모님. 먼저 보고 판단하시는 게 맞죠. 그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통화가 끝났다.
경자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휴게실 창문으로 가을 햇살이 들어왔다. 따뜻했다. 그러나 경자의 손은 차갑고 축축했다. 휴대폰을 쥔 손. 펜을 쥔 손. 둘 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토요일... 토요일에 실물을 본다...'
경자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통화 기록에 '영달공인중개사사무소'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이게 현실이구나. 정말로 시작되는구나.
메모지에 펜으로 적기 시작했다. 손이 흔들렸지만, 또박또박 적었다.
토요일 오후 2시 여의도역 5번 출구 영달공인중개사사무소 조영달 소장님
그 글씨를 보니 더 현실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스마트폰 화면 속 숫자가 아니라, 곧 자신이 가서 봐야 할 실제 장소. 실제 사람. 실제 집.
경자는 계산기 앱을 켰다. 손가락이 화면을 두드렸다. 익숙한 동작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수십 번, 수백 번 계산한 숫자들.
2억 2천.
손가락이 숫자를 누를 때마다 심장이 조여왔다.
전세 1억 9천.
그럼 갭은 3천만 원.
'3천만 원이면... 내가 가진 돈으로는...'
취득세, 중개수수료, 법무사 비용, 보험료... 이것저것 다 더하면 1천5백만 원은 더 들 거야. 그럼 총 4천5백만 원 가까이.
숨이 턱 막혔다.
그녀가 슈퍼마켓에서 십이 년 동안 모은 돈이 1,000만 원이었다. 매달 조금씩. 정말 조금씩. 월급 120만 원에서 생활비 쓰고 남은 돈. 한 달에 많을 때 10만 원, 적을 때 5만 원.
커피 한 잔을 아꼈다. 점심을 도시락으로 싸왔다. 옷을 사고 싶어도 참았다. 친구들 모임도 자주 빠졌다. "돈 아껴야 해서"라고 말하기 부끄러워서 "오늘 몸이 안 좋아서"라고 핑계를 댔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
1,000만 원.
'부족해... 3천5백만 원이나 부족해...'
대출.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겁게. 어둡게.
'신용대출을 받아야 해...'
경자는 다시 계산기를 두드렸다.
3천만 원을 빌린다면. 금리 14%.
손가락이 멈췄다. 14%. 높았다. 너무 높았다. 그러나 신용등급이 높지 않은 경자에게는 그게 현실이었다.
10년 동안 갚는다면, 매달 60만 원.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60만 원... 월급 120만 원에서 60만 원...'
남는 돈이 60만 원. 거기서 교통비, 통신비, 용돈, 식비...
'안 돼. 너무 많아.'
20년으로 늘리면? 매달 50만 원 정도.
'그래도 월급의 거의 절반이잖아...'
경자는 눈을 감았다. 숫자들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나 곧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남편. 남편 월급이 250만 원. 합치면 370만 원.
경자는 다시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희망을 담아서.
370만 원에서 대출 60만 원 빼고. 수진이 학비랑 생활비 100만 원 빼고. 남는 돈은 210만 원.
'210만 원... 거기서 우리 생활비, 공과금, 차량 유지비, 보험료...'
빠듯했다. 정말 빠듯했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할 수 있어. 우리 둘이 벌면... 할 수 있어.'
경자는 메모지에 작은 글씨로 적었다.
월 상환: 60만원 (10년) 남은 돈: 210만원 빠듯하지만... 가능?
그 글씨들을 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일단 가서 보자. 실물을 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 어쩌면 가격을 깎을 수도 있고...'
휴게실 시계를 봤다. 11시 20분. 벌써 20분이나 쉬었다. 미숙이 혼자 손님들을 다 받고 있을 것이다. 미안했다.
경자는 일어났다. 거울을 봤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중요한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아니면 첫 데이트를 앞둔 소녀처럼.
'진짜 시작이네. 이제 진짜 시작이야.'
문을 열고 나갔다. 매장. 형광등 불빛. 손님들. 카트 소리.
미숙이 힐끗 쳐다보며 웃었다.
"언니, 무슨 좋은 일 있어? 얼굴이 환해졌는데?"
"응... 그냥."
경자는 대답을 흐렸다. 말할 수 없었다. 아직은.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면 반대할 것 같았다. 미숙도, 남편도, 아들들도. 모두 반대할 것 같았다.
계산대로 돌아갔다. 손님들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가락이 자꾸 틀렸다. 바코드를 두 번 찍기도 하고, 거스름돈 계산을 잘못하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손님에게 사과하며 다시 계산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토요일 생각뿐이었다.
'실물을 본다... 한강뷰를 직접 본다... 그 집이 내 것이 될 수도 있어...'
조영달 소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런 기회는 다시 안 와요.'
'공실 걱정 없어요.'
그 말들이 마치 주문처럼 반복되었다. 달콤하게. 유혹적으로.
그날 하루는 이상하게 빨리 지나갔다. 아니, 어쩌면 느리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경자에게는 시간이 제대로 흐르는 것 같지 않았다. 손님들을 받고, 바코드를 찍고, 카드를 받고, 영수증을 건네는 동작들이 마치 꿈속에서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6시. 유니폼을 벗었다.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가방을 들고 슈퍼마켓을 나왔다.
저녁 공기가 차가웠다. 해가 벌써 기울어 있었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구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경자는 다시 휴대폰을 꺼냈다. 통화 기록을 봤다. '영달공인중개사사무소'. 그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토요일... 이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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