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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죽이기

명절 대연휴, 나 홀로 시간 죽이다가...

by 이에누

명절은 늘 시끌벅적했다. 설과 추석 때 우리 집에서 늘 명절 차례를 지냈다.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건 힘들기는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멀리 대구에 사는 사촌 형님들의 집까지 안 가도 되고 우리 집으로 동생과 아들, 며느리, 손주가 모여든다. 내가 대장이 된 듯한 뿌듯함이 크다.

이런 만족감은 아내가 나보다 큰 것 같다. 장모는 종갓집 며느리로 봉제사를 하면서 식객을 대접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종의 권력을 즐기는 것 같았다. 평생 식객들을 휘어잡던 장모의 기질을 아내가 빼닮았다.

그런데 작년부터 달라졌다. 아들과 딸의 의견에 밀려 설 차례만 남기고 추석 차례는 없애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긴 연휴가 텅 비어버렸다. 아들 내외는 중국 여행으로, 아내는 친구들과 이박삼일 지방 여행을 떠났다. 나는 덩그러니 집에 남았다. 아니,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출발 직전 아들이 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를 내밀었다.

“아빠, 소은이가 기르는 달팽이 좀 부탁드려요.”

나는 ‘독거노인’ 대신 ‘달팽이지기’라는 새로운 직함을 얻게 되었다. 촉촉한 황토흙, 단호박 조각, 케이스 뚜껑을 열어 통풍해 주라는 관리 수칙까지. 카톡으로 내려온 지령을 성실히 수행했다. 하루 한 번 물을 뿌려주고, 먹이를 갈아주고, 손녀가 아끼는 달팽이를 지킨다는 사명감에 은근히 불타오르기도 했다.

사실 이런 임무는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아들이 기르던 병아리, 햄스터, 이구아나까지 내가 홀로 맡아 돌보던 시절이 있었다. 늘 누군가가 여행이나 연수로 집을 비우면, 나는 남아서 생명을 지켜야 했다. 아빠이자, 이제는 할아버지이자, 책임을 떠안은 관리자.




달팽이는 요즘 소은이가 자주 부르는 동요의 주인공이다. 유치원에서 배운, 제법 긴 가사다. 그 노래에 나오는 달팽이가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다.

보슬보슬 비가 와요
하늘에서 비가 내려요
달팽이는 비 오는 날
제일 좋아해

야호 마음은 바쁘지만
느릿느릿 달팽이

아직도 한 뼘을 못 갔구나
조원경 작사 김진성 작곡, 달팽이의 하루

작은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눈은 반짝이며 나를 힐끗 본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웃음을 터뜨리지만 이내 다시 멜로디로 돌아간다. 손녀의 목소리는 노래라기보다 한 편의 그림책 같다. 풀잎 위로 빗방울이 반짝이고, 달팽이가 느릿느릿 미끄럼을 타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진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빠와 엄마도 웃음을 터뜨린다. 할머니는 핸드폰을 재빨리 들어 동영상을 찍기 시작한다. 가족 모두가 작은 무대의 관객이 되고, 소은이는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

네 살 손녀 소은이는 글자를 아직 읽지 못한다. 그런데도 “달팽이의 하루”라는 제법 긴 동요를 척척 불러낸다.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어떻게 긴 가사를, 게다가 글자도 모르는 아이가 또박또박 외워서 노래할 수 있을까?

“보슬보슬 비가 와요, 하늘에서 비가 내려요…”
쪼그만 입에서 꼬물꼬물 흘러나오는 가사는 단순히 소리의 나열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노래를 외우는 힘은 멜로디와 리듬에서 나온다. 단어는 음과 박자에 실려 하나의 패턴으로 저장된다. 그래서 글자를 몰라도, 노래는 귀와 몸을 통해 기억된다. 특히 반복적인 구절이 많으면 더 쉽게 각인된다.

“야호 마음은 바쁘지만, 느릿느릿 달팽이…”
이런 부분을 부를 때 소은이의 표정은 신이 나 있고, 노래는 곧 놀이가 된다. 풀잎 미끄럼을 타는 달팽이 장면을 떠올리듯, 아이는 그림과 소리를 동시에 기억한다.

소은이가 부른 “달팽이의 하루”는 단순한 동요가 아니다. 그것은 아이가 세상을 흡수하는 방식이자, 우리에게도 잊고 있던 배움의 근원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비 오는 날 풀잎 위의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충실한 하루를 살아가는 존재의 노래. 그리고 그 노래를 또박또박 따라 부르는 손녀의 목소리는, 내 하루의 가장 큰 선물이 된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머금는다. 무릎 위에 어린 나를 앉히고 글자를 가르쳐주던 침산 이수인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이제는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게 감개무량하다. 세대는 그렇게 흐르고, 아이는 노래로 세상을 배우고, 나는 그 노래를 듣는 것으로 다시 배운다.




이 아름다운 풍경에 웃픈 사건이 끼어든 것이다.


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날도 케이스 뚜껑을 열어두고 글쓰기에 몰입했다. 두어 시간이 지나 노트북을 덮으며 달팽이 집을 닫으려는 순간, 이상한 정적이 흘렀다. 없다. 달팽이가 보이지 않았다. 손녀의 노래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느린 달팽이가 아닌가?

나는 화분을 뒤지고 휴대폰 불빛으로 구석구석을 비췄다. 삼십 분 남짓, 온몸에 땀이 흥건하도록 뒤지고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하지만 늦었다. 하필, 전날 연휴맞이 소독이 있었다. 바퀴벌레 퇴치 패치 근처에서 달팽이의 주검을 마주한 것이다.

순간 머릿속에 온갖 장면들이 휘몰아쳤다. 까칠한 아들의 싸늘한 표정, 손녀의 뿌엥 울음소리, 아내의 잔소리. 아무도 없는 집에서 ‘달팽이 죽이기’라니. 웃지 못할 명절의 사고였다.

나는 곧장 수습 모드에 들어갔다. 아파트 화단, 놀이터 나무 둥지, 근처 공원의 잡풀더미까지 탐문했다. 지나가는 아이에게 물었다.
“얘야, 혹시 달팽이 본 적 있니?”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이스크림만 핥아먹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달팽이 분양’ ‘달팽이 급구’까지 쳤다. 중고거래 앱에선 분양 대신 ‘달팽이 모양 인형’만 줄줄이 뜬다. 순간 머릿속에 번쩍! 친구와 지인들 카톡방. 손주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 한 마리쯤 여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키보드를 두드렸다. 손가락은 빠르게 움직였다.

“급합니다. 달팽이 한 마리 구합니다.
종류 불문, 크기 무관.
명절 연휴 마지막 날까지 조달 가능하신 분 연락 바랍니다.
손녀의 눈물이 아른거립니다. SOS!”

메시지를 날리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외로운 명절, 차례도 없고 가족도 떠난 집에서, 나는 달팽이의 명복을 빌며 새 달팽이를 구걸하고 있었다.

카톡방에는 곧장 댓글이 달렸다. 위로인 듯, 도움인 듯, 약 올리는 듯...

“달팽이 말고 거북이는 안 되겠습니까? 느린 건 비슷한데요.”

“저희 집엔 민달팽이 많은데… 포장해서 보내드릴까요?”

“달팽이보다 손녀의 눈물이 더 무섭죠. 빨리 구해야겠네!”

“형님, 그냥 마트 가셔서 단호박을 사세요. 거기 붙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아, 이거 광고 문구로도 되겠는데요? ‘달팽이를 찾습니다. 손녀의 눈물이 달려 있습니다.’ 눈물 마케팅 갑니다~”

나는 카톡창을 보며 쓴 웃음을 흘렸다.
명절 차례 대신 열린 건 지인들과의 달팽이 구하기 긴급회의.




인터넷에 “달팽이를 찾습니다”라는 글을 다시 한번 올려볼까?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SOS를 칠까? 손주가 있는 친구라면 혹시 한 마리쯤 분양해 줄지 모른다며 혼자 피식 웃는다.

긴 연휴의 고요 속에서, 나는 달팽이와 함께 명절을 보냈다. 아니, 달팽이의 마지막 하루를 지켰다. 나는 깨닫는다. 가족이 모여 북적이는 자리의 힘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작은 존재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손녀는 다시 돌아올 테고, 언젠가 또 새로운 달팽이를 기를 거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육아의 협력자이자, 달팽이 지킴이가 될 것이다.

명절은 이렇게 지나간다. 느릿느릿, 달팽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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