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
새벽시간,
대부분의 사람이 꿈속에 있는 푸르스름한 시간대의 연락이 두려운 나이가 되었다.
10대의 새벽연락은 친구와의 그저 못다 한 수다나 연애상담, 소소한 고민상담, 애교 섞인 투정정도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심각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곱씹을수록 시시한 내용들.
20대의 새벽연락은 헤어질 위기이거나 미련이 느껴지는 연인과의 대화가 주를 이루었다.
이따금씩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듯 나누는 사랑의 담소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컸다.
30대의 새벽연락은 예의 없고 능력은 더 없는 직장 상사의 시도 때도 없는 업무지시나 수정사항이 빈번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메모장 기능 정도였으며, 내일 할 일을 잊지 않기 위한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 알람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세월이 더 흘러 40대가 가까워질수록 그 시간대의 연락이 두렵다.
좋지 않은 소식일 확률이 90% 이상임을 경험적으로 직감하기 때문일까.
고요함을 넘어 적막의 시간에 남겨져 있는 부재중 전화에는 특유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여러 해 가슴을 쓸어내린 누적데이터를 바탕으로 짧은 찰나에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최악을 상상한다.
떨리는 가슴으로 남겨진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건 전화 신호음이 한 번 울릴 때마다 상상은 몸집을 키운다.
새벽연락이 시시한 수다나 사랑의 담소보다는 사고나 부고의 소식을 대변해 간다는 것이 나이 먹어가고 있음을 실감케 할 때, 문득 서글퍼진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지금보다 더 세월에게 내 삶을 내어주게 되면, 진짜 어른의 경지라는 것에 닿게 되면 그땐 서글픔을 넘어 영원한 이별이 그저 한 과정임을 받아들이고 순응하게 되는 날이 올까.
그땐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