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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 뉴요커 Nov 27. 2024

우리는 과연 더 행복해 지고 있는가?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 유치환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아니 이 시가 아니라도 우리의 소시절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오늘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빠르고 광범위한 소통의 수단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카카오 단톡방에서 수많은 가입자에게 한꺼번에 소식을 보낼 수 있습니다.

또 지구 건너편에 있는 지인에게 바로 문자나 이메일을 보내고 아니면 바로 전화를 할 수 있습니다.

현대 문명 덕에 얼마나 빠르고 편리한 세상이 되었는 지 모릅니다.

우리 세대가 어릴 적에는 청마의 이 시가 노래하듯  편지지나 엽서에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서정주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을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어쩌구 저쩌구

이렇게 편지지에 써서 봉투에 담아 떨리는 마음으로 보내면

일 주일 쯤 후이 지나 예쁜 그림과 빠지지 않고 하트가 근사하게 그려진 답장을 받곤 했습니다.

언제 답장이 오나 조마조마 기다리기도 하고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고 먼저 받으려고 우편함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경험 한 번 쯤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정도는 양반이지요. 조선 시대 정약용이 귀양지에서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나 

기대승이 이황에게 보낸 편지는

사람이 꼭꼭 가슴에 품고 며칠 이상 걸어가서 전하고 또 답을 받아 왔을 것입니다.

짚신을 가득 옆에 매고, 개나리 봇짐을 지고 그 사람은 먼길을 왕래하며 편지를 전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보다 더 애뜻하게 또는 더 치열하게 편지를 작성하고 답장을 받곧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카카오톡이나 전화, 이메일, 팩스 등 편리한 소통수단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듭니까?

이 빠른 소통의 수단이 우리를 이웃이나 자식을 더 가깝게 만들고 있습니까?

지구 저편에 보낸 편지는 우리를 더 재촉하고 그래서 더 피곤하고 시달리게 하지는 않는지요?


얼마전 지인 한 분의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노트북 두대와 이를 연결한 큼직한 모니터였습니다. 아마 하시는 일 때문에 먼 대륙에 있는

사업자와 소통하고 연락하는 일 때문에 이런 장비가 필요할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과연 시차 때문에 점점 더 일이 힘들어진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메일을 받아보기는 하지만 답을 보내야 하는 조급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 보지 못한 페루에서 포도가 세네갈에서 갈치가 캘리포니아에서 오렌지가 옵니다. 

요즘은 사람보다 음식이 더 멀리 여행하고 있습니다.

페루의 포도를 먹고, 세네갈의 갈치를 구워 먹고 캘리포니아의 오렌지를 먹는 우리가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작성하던 그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몸속에 자라는 암덩어리를 온갖 첨단장비로 촬영하고 피를 뽑아 수치를 분석하며 치료하는 현대인이  

몸 속에 자라고 있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자식들과 함께 살다 

홀연히 저 세상으로 떠나던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보다 나은 삶을 산다 할 수 있을까요?

과학 기술 문명의 발전이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하고 여유롭게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도 여전히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터로 또는 모임에 나설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과거보다 바빠진 것이 분명한 우리의 행복 지수도 덩달아 높아지길 기원해 봅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 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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