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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아이,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

심리상담 이야기

by 이상혁 심리상담가

‘내면 아이(inner child)’라는 개념은 종종 심리상담에서, 감정적으로 상처 입은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돌보는 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 개념은 단순히 상처 입은 감정을 달래는 일 이상의, 훨씬 더 깊은 사유의 장을 제공한다. 내면 아이는 우리 안의 '시간'을 거슬러 존재하는 실재다. 그는 과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무의식의 연속이자, 미래에 어떤 존재가 될지를 결정짓는 근본적인 틀이다. 내면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곧 인간 존재의 시간성과 감정의 구조, 그리고 주체 형성의 근본적인 조건들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다.


내면 아이는 단순히 유년기의 기억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는 기억 이전의 존재이기도 하며, 언어 이전의 감각과 정서의 결절점이다. 아이는 세계를 개념이 아니라 감각으로 경험하고, 언어가 있기 전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는 아직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지 않은 존재이며, 욕망과 결핍의 구조에 순응하지 않은 주체다. 그러므로 내면 아이를 만난다는 것은, 다시 ‘존재하기’를 배우는 일이다. 그것은 이미 짜여진 사회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아직 가능성의 차원에 있는 존재로서의 나를 되찾는 일이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이 내면 아이를 억압하고, 교정하고, 삭제함으로써 ‘사회적 주체’로서 자리 잡는다. 학교는 우리를 어른으로 만들기 위해 아이를 통제하고, 가정은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내면의 자발성을 깎아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내면 아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무의식 속에 스며든 감정의 잔류물로서, 때로는 타인의 말 한 마디에 과잉반응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공허로, 그리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로 돌아온다. 이 아이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자아가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의 짐을 짊어진 채 살아남아 있다. 내면 아이는 '이해받지 못한 감정'의 형태로 존재하며, 우리가 어른이 된 뒤에도 반복되는 자기 파괴적 관계와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회의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 아이는 상처입은 타자들과 연대할 수 있는 감정적 토대를 제공한다. 그는 상처받기 전의 순수한 상태가 아니라, 상처받은 그대로 살아남은 존재다. 그 상처는 흔히 타인에게 보이기를 두려워하고, 약함을 인정하는 데 서툴지만, 그 자체로 강한 감수성의 토양이다. 우리는 내면 아이와 마주함으로써, 타인의 내면 아이와도 연결될 수 있다. 그것은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정서적 연대이며, 말이 닿지 않는 고통을 침묵으로 이해해주는 방식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과 타자 사이에 놓인 무형의 감정 구조를 들여다보는 일은 윤리의 새로운 형식을 제안할 수 있다. 그것은 ‘올바른 행동’을 넘어, 존재의 취약성을 수용하고, 그 취약함 속에서 타자와 나 자신을 끌어안는 감정의 윤리이다.


따라서 내면 아이는 병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 아이는 우리가 잊고 지낸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상태를 환기시킨다. 어린이는 늘 세계와 직접 맞닿아 있고, 존재의 신비 앞에서 놀라움을 느낄 줄 아는 존재다. 그 아이는 인간을 도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대하고, 시간을 효율이 아니라 체험의 연속으로 인식하며, 삶을 목적이 아니라 놀이의 형식으로 살아낸다. 그러므로 내면 아이를 만난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회복하는 일이며, 존재와 관계 맺는 방식 자체를 새롭게 구성하는 실천이다.


하지만 내면 아이를 꺼내어 돌본다는 행위는 결코 로맨틱한 자가 치유의 제스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내면 아이는 우리가 살아온 억압의 역사와 조우하게 만들며, 그 억압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조직하고 파편화해왔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그는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포기한 모든 욕망과, 순응이라는 이름으로 타협한 수많은 가능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내면 아이와의 만남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며 사회비판적이다. 그 아이가 침묵하게 된 이유를 묻는 일은 곧 사회적 억압과 폭력에 대한 저항의 사유로 이어진다. 내면 아이는 말하자면, 우리 안의 가장 오래된 저항이며, 가장 순수한 불복종이다.


결국 내면 아이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 위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일이다. 그것은 실제적 행위이며 존재론적 전환이다. 삶을 다시 감각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의 나와 화해하고, 나 아닌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내면 아이는 상처 입은 존재이자, 동시에 새롭게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은 우리가 지금껏 부정해온 감정, 숨겨온 욕망, 두려워하던 기억 속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내면 아이는 ‘극복해야 할 과거’가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 현재’다. 그는 존재의 가장 약한 곳에서 나오는 힘이자, 가장 어두운 기억 속에서 퍼져 나오는 빛이다. 우리는 그 아이를 통해, 아직 오지 않은 삶의 가능성, 아직 열리지 않은 주체성의 지평을 상상할 수 있다. 내면 아이는 단지 심리적 개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실존이다. 그리고 그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며, 인간 존재에 대해 다시 묻는 일이다. 우리가 삶을 숙고해야 하는 이유는 어쩌면 바로 그 아이가 말 없이 우리 안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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