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이야기
나르시시스트와의 사랑. 처음엔 찬란하다. 그는 아주 세밀하게 사랑의 무대를 꾸민다. 마치 당신이 세계의 중심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당신에게만 1,000% 집중한다. 그것은 너무나 진지하고 사려 깊어서 마치 운명의 상대를 만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 모든 관심은 사실 당신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적인 환상, 즉 ‘자기애적 자아상’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다. 당신은 그의 과대한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거울이 반사되는 이미지가 흐트러지지 않게 당신은 점점 움직임을 조심하게 되고, 결국 굳어버리게 된다.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분노다. 당신은 분노할 수 없고, 설령 분노하더라도 곧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당신의 감정을 비틀고, 의심하게 만들며, 그것을 당신의 문제로 되돌리기 때문이다. 그의 잘못을 지적하면 그는 다정하게 (혹은 냉정하게) 이렇게 말한다.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너 피해의식 있구나” “그건 네 과거 때문이야” 매번 나르시시스트는 그 감정을 해석하지 못하게 유도한다. 오직 자신의 감정만이 현실이고, 당신 감정은 항상 지나치거나, 틀리거나, 조작된 것으로 치부된다. 그리하여 결국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게 된다.
가장 무서운 건, 당신이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아주 정교하게 당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만이 그를 이해할 수 있고, 당신만이 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당신만이 그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 이는 중독처럼 작동한다. 간헐적으로 주어지는 칭찬과 애정은 도파민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반복될수록 당신은 그의 인정을 갈망한다. 그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능숙하게 조절한다. 때론 주고, 때론 빼앗으면서 당신의 중심을 그의 손 안에 묶어둔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당신은 스스로의 감각을 잃는다. 옷을 고를 때도, 말을 할 때도, 당신이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하기보다 ‘그는 이걸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 생각의 패턴은 곧 신경망이 되고, 당신은 부지불식 간에 뇌의 주도권을 그에게 양도하게 된다. 모든 선택은 그의 기준을 반영하고, 모든 판단은 그의 기대를 따른다. 당신은 점점 그의 일부가 되고, 당신의 본성을 잃는다. 당신은 무너진다. 가스라이팅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 깊이에서 작동한다.
하지만 이 같은 격변의 순간에도 당신은 계속 그를 걱정한다. 그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는 어린 시절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당신이 어떻게 하면 그를 도울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여기에 나르시시스트의 전략이 숨어 있다. 그는 피해자의 가면을 쓰고,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다. 그의 고통은 항상 우선되고 당신의 고통은 늘 사소하다. 당신은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그의 구조를 공고히 하고 있다. 그의 과거가 현재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질문해야 한다. ‘이 관계는 나를 살게 하는가, 아니면 죽게 하는가?’ 나르시시스트는 사람을 천천히, 아주 조용히 마르게 만든다. 당신은 웃음이 줄고, 생각이 줄고, 말이 줄고, 생기가 줄어든다. 관계 안에서 당신은 점점 사라진다. 사랑은 사람을 키운다. 당신을 더 예민하게, 더 생생하게, 더 자유롭게 만든다. 그런데 이 관계는 정반대다. 당신은 조심하고, 침묵하고, 위축되고, 무력해진다.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 겨우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단 하나의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자.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그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관계는 경고등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그의 비대한 자기애적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건강한 사랑은 자신의 감정을 보살피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지금 이 순간, 당신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 감정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말로. 당신의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