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부터 어두웠을지도 모르는 그 출발
아직 10월 말인데도 불구하고, 불과 1-2주 전의 채 가시지 않은 여름 기운을 머금은 가을의 향을 채 맛보기도 전에 겨울이란 녀석이 어느새 성큼 또 그렇게 발 앞으로 한가운데 다가오고야 말았다. 오늘 아침의 온도는 정확히 0도, 체감상으로는 살짝 영하에 가까운 쌀쌀함이 껴입은 옷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걸 보니, 겨울은 어느새 그렇게 슬쩍 가을을 시샘하며 조금 일찍 그를 밀어내 버리고 있다.
나는 11월 말에, 그것도 새벽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너는 겨울 호랑이에 그것도 새벽에 태어났으니 딱 맞게 태어난 사람으로, 굶어죽지는 않을 팔자라는 말을 으레 해주셨다. 뭐, 실제로 호랑이가 야밤에 어떻게 활동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옛 구전설화에 밤에 호랑이가 물어간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 걸 보면, 그 말씀은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릴 때부터 여름보다는 겨울이 더 좋았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허덕이며 시원한 바람을 원하는 것보다는 방 안에서 따뜻하게 보내는 편이 좀더 마음이 놓였고,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있어도 여름보다는 겨울에 더 마음이 편안해졌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면 내가 외부요인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멀티태스킹이 잘 된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주 모니터로 일을 하고 있다가도 오른쪽 보조모니터에 메신저나 메일함이 울리면 잠시 내용을 먼저 확인하곤 하기 때문에 그렇다. 주변의 자극에 빠른 대처가 가능하다는 건 분명한 장점이지만, 나로서는 꽤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반응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성향상 뭔가 어른거리는 걸 바로 치우지 않으면 거슬리는 것을 참지 못한다. 메시지함의 읽지 않음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처럼. 그러다 보니 여름은, 날이 좋으면 나는 언제나 힘들어했던 모양이다. 따뜻한 날에 사람들은 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내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돌발행동을 많이 했으며, 그에 따라 내 반응도도 더 많이 발휘되어야 했기 때문에.
날이 오늘같이 추워진 날은 반면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행동이 조금 움츠러들고, 말수도 적어지게 된다. 활동적인 사람들조차 너무 춥다고 뭔가를 하자고 하지 않게 되고, 대부분 실내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자주 만들어진다. 물론 실내에서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똑같이 자극이 강한 상황이 나오겠지만, 그런 자리는 자주 갖지 않으면 되는 일이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겨울이 참 편안하다. 수많은 자극들이 조용해지고 차분해지는 순간,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고 차곡이 접어나가는 나의 활발한 활동들도 조금 더 탄력을 받는 기분이 든다. 남들에게는 얼른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그저 추운 어느 날일 뿐이겠지만, 나로서는 오랜 기다린 끝에 다시 찾아온 겨울이 사뭇 반갑다. 그리고 내심 기대하게 된다, 이 겨울 동안, 나는 또 무엇을 내 안에서 꺼내 쓰게 될까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