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보다 먼저 배운 건, 마음의 언어였다
아내와 나는 아이 육아에 대해서 서로의 역할에 대해 정확하게 분담해 둔 부분이 있다. 2025년에 꽤 드문 외벌이 가족으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내야 하는 나 대신에 아내가 대부분의 육아를 책임지지만, 교육에 한해서는 내 책임으로 정해 두었다.
물론, 이것은 내가 아내보다 더 똑똑하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고, 단순한 언어장벽의 문제다. 아무리 우리가 다문화가정에, 아내와 내가 서로 영어로 대화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중언어, 삼중언어에 노출되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아이들은 한국의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에 첫째 아이가 유치원에 가고 난 후부터 아이의 교육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맡겨졌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뭔가 아이의 교육에 큰 뜻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전에 초등학교도 가기 전에 벌어지고 있는 선행학습 경쟁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을 다룬 적이 있듯이, 나는 기본적으로 아이의 교육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면 요즘 같은 시대에서는 어떻게 아이 대학을 보내려고 그러냐, 걱정되지 않느냐라는 말들을 주변에서 하곤 하지만, 사실 잘할 아이는 내가 그렇게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잘할 것이다. 공부는 부모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하는 것이니까. 환경을 조성해 주고 그 환경에 뒤처지면 도태된다는 말들을 많이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런 건 공포 마케팅이고, 부모의 FOMO(Fear of Missing out) 심리를 아주 잘 건드린 마케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쨌든, 완전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곧 내년이 유치원 마지막 학년인 아이에게 학교에 가기 전에 문장 정도는 읽을 수 있게 해 줘야겠다는 마음에 또 쿠팡의 힘을 빌려 한글 문장을 같이 읽는 연습을 할 수 있는 책을 몇 권 주문했다.
내가 매일 아이가 잠들기 전 동화책을 세네 권씩 읽어주기 때문에 아이가 곧잘 말을 따라 했고, 그리고 지금 발화량이 아주 많은 아이로 성장했다고는 생각했지만 아이가 직접 ‘읽을’ 수 있는지는 잘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유치원에서도 많이 가르쳐주는지 어느 순간부터 첫째 딸아이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거나, 같이 편의점에 걸어갈 때 간판을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는데, 문장을 읽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딸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혼자서 하라고 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두 내향인인 아빠 엄마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외향적인 아이가 나왔을까 매번 신기해하는 노릇이지만, 큰딸은 절대 혼자 하는 그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혼자 하는 건 게임을 하거나 좋아하는 유튜브를 볼 때 정도일까? 그마저도 아빠 엄마가 바쁠 때 혼자서 할 무언가를 찾았다 뿐이지, 우리가 시간이 빈다 싶으면 여지없이 다가와 같이 할 무엇인가를 슬금슬금 들고 오는 그런 아이다.
그래서 책이 집으로 배송되어 오자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새로운 놀잇감을 찾아 흥분한 아이의 표정으로 내게 포장을 뜯어 쓱 하고 내밀었다. 당장에라도 오늘 다 읽어버릴 것 같은 기세로. 책의 첫 장을 펼쳐 한 문장 한 문장 아이에게 설명하며, 이건 이제부터 아빠가 읽어주는 게 아니라 나윤이가 읽어볼 거야. 아빠에게 책을 읽어준다고 생각하고 읽어봐 하고 문장을 짚어 주니 내 생각보다 아이는 완벽하게 책을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문장이란 게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니라, ‘너구리가 겨울에 나무 밑에 있는 도토리를 찾아요’ 같은 정도의 간단한 문장이었지만, 내가 특별히 도와주지 않아도 띄엄띄엄이 아니라 꽤 괜찮은 속도로 읽는 아이를 보고 어느새 이렇게 읽을 수 있게 되었지? 하고 내심 놀랐다. 계속해서 책을 읽는 아이를 칭찬해 주며 나는 딸에게 글자도 한번 써 볼까? 하고 제안하고 펜을 가져왔다.
사건은 거기에서 터졌다. 수영이라는 글자를 써야 했는데, 아이가 ㅅ을 쓸 때 보통 위에서 밑으로 내리는 방식으로 쓰는 게 아닌 밑에서 위로 올리는 방식으로 쓰고 있는 걸 보고 나는 의아했다.
“나윤아, ㅅ을 이렇게 써 보는 건 어떨까? 아빠 하는 거 잘 봐봐, 위에서 아래로 자 하나, 둘”
-응 아빠 알겠어.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나는 아이가 따라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해 보지 않았다. 평소 내가 하는 걸 그대로 잘 따라 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그때만큼은, 내가 몇 번이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써도 계속해서 알겠다고는 하는데 아래에서 위로 ㅅ을 올려 쓰는 걸 보고 나는 진심으로, 순수한 궁금증에 딱 한 문장을 또 내던졌다.
“나윤아, 왜 그래? 그렇게 쓰는 게 편하니?”
그 말을 하자 그러나 아이는, 어쩌면 보통 그랬듯이 나를 가만히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오르는 것을 보고 나는 잠시 책을 덮고 아이를 안아주며, 아빠는 너를 혼내려고 하지 않는다. 아빠는 뭔가를 가르쳐줄 때 절대 너를 혼내지 않는다.
아빠는 그저 궁금했던 거고, 그게 더 편하면 그렇게 써도 괜찮다. 하지만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면 아빠는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물어보는 거다.라는 말을 이어가며 우는 아이를 달래 주었고, 아이는 내가 한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날의 공부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그날 아이를 재우고 밤에 자기 전 아내와의 대화 시간에, 그리고 아내는 나에게 말 한마디를 전했다. 자기에게 딸이 말하기를, 아빠가 왜 그러냐고 물어봤을 때 자기를 혼내려는 줄 알고 마음이 따끔따끔해서 조금 울었다고.
그 말을 듣고 나니 귀여우면서도, 새삼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왜’라는 질문이 나의 낮은 목소리와 차분한 톤으로 인해 굉장히 공격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MBTI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솔직히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굉장히 감정에 충실하고, 예민하면서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 이 이야기를 회사에 가서 들려주니, 동료 중 한 명이 “나는 그렇게 너 뭐 하냐?라고 얘기하면 너무 상처받아”라고 말해, 왜 그러냐고 물어봤지 뭐 하냐고 하지 않았다 반박했지만, 아마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들에겐, 나의 ‘왜’는 ‘지금 뭐 해?’가 되는 것이겠지.
앞으로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더 많은 질문을 하거나 공부를 가르쳐줘야 할 때에도 이런 일은 많이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답이나 빠른 교정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안전한 마음의 공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앞으로는 가르치기보다 먼저 들어주고, 설명하기보다 함께 생각하려 한다. 아이가 세상을 배워가는 동안, 나 역시 아이를 통해 마음의 언어를 배워갈 것이다. 그렇게 T아빠는, 점점 F의 세상으로 공감을 배워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