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첫눈이 내려앉은 해발 1,100m의 길에서 제주에 눈 소식이 들린다는 건 늘 의외의 순간에 찾아온다.
따뜻한 바람이 남아 있을 것 같은 늦가을에, 산 위에서는 이미 겨울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느슨해진 감각을 깨운다.
올해 첫눈 역시 그렇게 조용히 내렸다.
1100고지라 불리는 한라산 중턱, 해발 1,100m의 길 위에서다.
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퍼진 뒤 아침 일찍 1100도로에는 여행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등산 장비를 갖추지 않아도, 그저 차를 타고 도로를 따라 오르기만 해도 충분히 겨울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이 이곳을 향한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해발 1,100m가 만든 ‘겨울의 입구’
1100고지는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관통 도로 한가운데 자리한다.
이 지점은 고도가 높아 기온 변화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간인데, 불과 수 분 사이에 풍경이 가을에서 겨울로 옮겨가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차창 너머로 스치는 능선은 어느 지점부터 갑자기 하얗게 번지고, 도로 위로 엷게 깔린 설편이 이곳의 계절을 말없이 가리킨다.
겨울철 이 도로가 여름보다 훨씬 붐비는 이유도 비슷하다.
오랜 산행 없이도 눈꽃이 핀 숲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겨울을 짧게 경험하고 싶어 하는’ 여행자들에게 적합한 형태의 여정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습지가 품은 겨울의 고요
1100고지 일대에는 고산 습지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지층의 특성상 물이 땅속으로 깊이 스며들지 않아 오래 머무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그 위로 사계절 각기 다른 표정이 떠오른다.
겨울이면 얕게 얼어붙은 수면 사이로 희미한 바람 자국이 남고, 억새 줄기 사이에 고여 있던 물빛은 탁해지며 계절의 무게를 드러낸다.
이곳이 오랜 기간 보전지역으로 유지되어 온 것도 고산 습지의 생태적 가치 때문이다.
철새가 일시적으로 머물기도 하고, 멸종 위기 생물의 서식 흔적이 보고되기도 한다.
여행자에게는 이런 정보가 설경을 단순한 풍경을 넘어 하나의 생태로 바라보게 하는 기준이 된다.
짧지만 기억에 남는 탐방로
탐방안내소에서 시작되는 자연학습탐방로는 데크로 조성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다.
길지 않은 산책인데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른 길처럼 느껴진다.
겨울엔 발밑의 습지가 얼어붙어 작은 균열을 만들고, 나무들 사이로 올라오는 차가운 공기가 걸음을 더 천천히 하게 만든다. 마치 여행의 속도를 이곳이 먼저 조절해주는 듯하다.
1100고지에 닿기 위해 특별한 준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차량으로 이동하면 손쉽게 닿을 수 있지만, 주차 구역이 넉넉하지 않아 주말에는 이른 시간 방문이 편하다.
고도 변화가 빠른 만큼 도로 결빙이 갑작스럽게 생기기도 하니 속도를 조금 늦추는 것이 이 계절에는 가장 중요한 안전장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환승이 필요해 시간 계획이 중요하다.
여행 동선이 촘촘한 일정이라면 차를 이용하는 편이 더 여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