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큐레이션 외전: 작곡가 윤이상 편
안녕하세요.
당신을 위한 클래식 큐레이션 클큐입니다.
그동안 클큐를 진행해오며
곡 말고 작곡가에 대해서도 소개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래식 큐레이션 클큐를 이어오며
늘 곡에만 집중해왔었는데요
그 이유는 분량 문제도 있고,
이야기가 분산되면 읽는 분들이 피로감을 느끼진 않을까 싶어
항상 다루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었으나 깊게 들어가진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작곡가 혹은 작사가들의 이야기인데요.
작사가, 작곡가의 인생을 알게 되면, 그 음악이 전혀 다르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인생이 곧 음악이니까요.
그래서 클큐를 조금 확장하기로 했습니다.
곡 중심의 ‘클큐’는 그대로 이어가되,
이제는 음악의 뒤편에 있는 사람들,
즉 작곡가와 시인,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깊이 들여다보려 합니다.
그 이름하여 클큐 외전.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지난 시간 다뤘던 가곡 ‘고풍의상’을 만든 작곡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선생님입니다.
통영의 바다.
그곳의 물결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다고 하죠.
그 바다에서 한 소년이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훗날 그 소년은,
그 물결을 ‘소리’로 바꾸어 세계에 전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윤이상(尹伊桑).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동양의 영혼을 서양의 음률로 새긴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1917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윤이상은
어린 시절부터 파도 소리, 어선의 노 젓는 리듬, 그리고 바람이 울리는 소리에 익숙했습니다.
그에게 음악은 악보가 아니라 자연의 숨결이었죠.
그는 학교에서 첼로를 배우며 음악에 눈을 떴지만,
그 당시 조선에는 작곡을 체계적으로 배울 길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서양 악보를 베끼고,
밤마다 바닷가에서 피아노 대신 ‘바람과 파도’를 연습 삼아 음정을 떠올렸다고 해요.
이 ‘소리의 기억’은 훗날 그의 음악 전반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의 관현악곡 <예악(禮樂)>이나 오페라 <심청>에서도,
그 바다의 울림이 들립니다.
1930년대, 그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했지만
식민지 청년에게 주어진 기회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 교사와 음악교재 편집 일을 병행했지만,
내면에는 늘 “진짜 음악”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해방 후 귀국한 윤이상은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작곡 활동을 시작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그의 삶은 다시 혼란 속으로 들어갑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결심합니다.
“음악의 중심으로 가야 한다.”
그곳은 바로 유럽, 그중에서도 서독 베를린이었습니다.
1956년, 그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독일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작곡가가 유럽 음악계에 진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죠.
그럼에도 그는 악보와 사전을 들고, 하루하루를 독학하듯 버텼습니다.
노력에 보답하듯 그의 재능은 곧 세상에 알려집니다.
그가 베를린에서 발표한 현악 5중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적 단편은
독일 비평가들 사이에서
“동양적 정신을 지닌 진정한 현대음악”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서독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의 중심 작곡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슈톡하우젠, 메시앙, 불레즈와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서양의 형식 속에서 ‘명상’을 노래했습니다.
불교, 도가, 그리고 한국 전통음악의 정신이
그의 12음기법 안에서 살아 숨 쉬었죠.
하지만 그의 인생은 영광만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1967년, 독일에서 활동 중이던 윤이상은
한국 정부에 의해 ‘간첩 혐의’로 지목되어 체포됩니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베를린에서 한국으로 강제 이송되어
남산 중앙정보부에 구금되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국제 음악계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카라얀, 스트라빈스키, 리게티, 메시앙 등
세계적인 작곡가와 지휘자들이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서한을 냈습니다.
결국 2년 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그는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죠.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조국에 돌아가지 못한 작곡가,
‘국외자(outsider)’로 남게 됩니다.
독일로 돌아간 윤이상은 더욱 깊어진 음악을 써내려갔습니다.
그는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오페라 심청 : 부녀의 희생과 화해
광주여 영원히 : 민주화의 상징
첼로 협주곡 밤의 노래 : 인간 내면의 침묵과 평화
그의 음악은 점점 ‘인간과 세계의 화해’를 주제로 한 철학적 언어로 확장됩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음악은 이념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화해를 위한 다리다.”
윤이상은 생의 끝까지 고향 통영을 그리워했습니다.
그에게 통영은 단지 고향이 아니라,
음악의 원천이자 정신적 근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한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1995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나며
“내 영혼은 통영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로부터 수년 뒤, 그의 유해는 약속대로 통영 앞바다에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통영에는
그의 이름을 딴 윤이상기념관, 윤이상국제음악제, 윤이상홀이 있습니다.
윤이상은 음악으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이념과 국경을 넘어,
음악으로 존재를 증명한 예술가였죠.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 오케스트라와 음대에서 연구되고 연주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늦게나마,
그의 이름이 다시 음악 교과서 속에 돌아왔습니다.
녹록치 않은 생애를 보낸 그여서 그런지
음악의 깊이가 참 다르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요.
국내에서 추방당해 독일에서 활동을 이어가면서도 그의 작품엔 언제나
한국의 얼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킨 예술가,
그리고 소리로 철학을 말한 작곡가.
그가 남긴 음악은 지금도
수많은 자국의 음악가들을 통해 널리 연주되고 있습니다.
다음 클큐 외전에서는 또 다른 작곡가의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지금까지 클큐 외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