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단강이냐 두만강이냐
10,30,
만주기행ㅡ[9탄]
[두만강과 웅녀]
목단강이냐 두만강이냐
잠시 고민하다가 목단강 보다는 두만강이 좋지 않겠냐는데 의견을 모았다
목단강 문학 단체에서 우리를 위한 축하 행사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하루 일정에 목단강까지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를 이동해야하기 때문에 저녁에 도착하면 그 쪽 문학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외에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목단강은 포기하고 두만강 기행을 결정 한 것이다
동북아 신문사를 운영하시는 이동렬 선생님께 사정을 이야기를 하는 박작가의 표정에서 묘한 비굴함이 보였는데 함께 죄스러운 마음이다
9시 호텔로 석하 원장님 차가 도착했다
연길시를 벗어난 차는 꼬불거리는 산길을 올라서서 산등성이에 오르더니 멈춘다
산 아래 멀리로 보이는 강이 있다 연길 시가지를 벗어나 구비치며 용정시를 뚫고 흐르는 저 강
혜란강이란다
잠시지만 연길과 용성에 대한 감성에 젖어 보면서 이제는 다시 못올 것이라는 예감으로 아늑한 그리움을 쌓는다
꼬불거리는 산길을 돌아돌아 내려서니 평도로가 나왔고 강을 따라 길이 뚫려져 있다
두만강이다
철조망 너머로 강 건너는 높은 산이 있고 강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가믈 따라 조금 달리다가 보니 도로공사를 한다고 중장비가 도로 옆에 흙을 쌓고 있다 도로를 넓이려고 공사를 하는것 같은데 장비가 찻길을 막고 있다 잠시 차에서 내려 강 건너 북을 본다
한적한 풍경이 되어 저 쪽도 철조망이 강을 가르고 있고 강을 따라서 도로가 있는데 길을 따라 전신주가 줄을 서 있다 사람들과 차량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적막감이 든다
두만강에 대한 동경의 흔적은 그냥 강으로 만 흐르고 있다.
공사장 인부의 통행 신호가 있었고 강둑을 따라 5분 쯤 달리다가 차는 다시 산길을 오른다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우거진 숲 만 보인다
얼마를 오르다가 차가 정차한 곳 사자 산을 보란다
사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고 물끄러미 북녘을 보고 있다
저기 사자머리 산에 오른면 굽이치는 두만강 절경이 보인다고 한다
다시 차로 5분 쯤 가니 사자머리 산 입구다 산 이름이 일광산이다 입구 옆으로 백년 사찰이 있었고 산 우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크게 높지가 않아서 오녀산성을 생각하면서 저쯤이야 하고 계단을 오른다 휴~ 그래도 내게는 벅차다
정상 가까이 오르니 전망대가 있다
아ㅡ 이게 두만강이다
강은 구비구비 그림이 되어 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곳은 관광객들이 모르는 곳 이란다 이런 절경이 있다니!
눈으로 담고 가슴에도 담고 폰에도 담는다
북과 중국을 가르며 흐르는 저 강
강을 따라 흐르는 나룻배를 상상해 보았다.
"눈물젖은 두만강"
김정구 선생님의 노래가 생각 났고 지긋이 눈을 감고 강을 보며 흥얼거려 본다
1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2.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임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연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전망대에서 다시 정상을 올라 북을 보니 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으로 작은 마을이 있다 똑같아 보이는 마을인데 이상하게 북을 보면 처량한 가슴이 앞선다
다시 차는 달려 도문에 있는 두만강 조각 공원으로 왔다 돌에 새겨진 "두만강 조각 공원"
중국 정부에서는 바위에 세겨진 이 공원 이름마져도 지우고 원래의 글자 순서를 바꾸어 한글을 아래로 내려 놓았다 자세히 보니 바꾼 흔적이 보인다 이게 강대국의 힘자랑이라고 하는 자존인가?
공원 광장을 둘러보며 강가로 갔다 강폭이 10m쯤 될까? 강 아랫쪽에는 중국과 북을 잇는 철교와 다리가 있었고 강 건너 마주보이는 산 아래로는 도로가 있는데 북은 너무나 조용했다
다리 밑으로 건물 몇 채가 있는데 이건 전시용이란다 사람이나 차량이라고는 볼 수가 없고 예전에는 빨래하는 사람들도 보였고 이를 지키는 군인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강물 만 한가로이 흐르고 있다
여기 두만강 조각공원에는 관광객들로 북적대고 조형물들은 한 껏 위새를 떨치고 있다
말로만 들어왔던 북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렸다
왜인가?
남과 북
다 같은 한 민족인데 북쪽 땅 만 보면 가슴이 아린다
강을 두고 차는 또 북으로 달린다 농가의 풍경과 펼쳐진 옥수수 밭은 겨울로 가는 농촌의 풍경을 자아낸다
30분 쯤 달렸을까? 한적한 호수가 보였고 그 뒤로 산 정상에 여인의 동상이 보였다
고조선의 웅녀상이란다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100m쯤의 아래 쪽에는 토굴이 보였는데 여기서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라고 한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웅녀는 원래 곰으로, 사람이 되고자 환웅에게 빌어 시험을 통과한 뒤에 여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
우리민족의 시조 단군왕금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웅녀상을 보면서 북간도에서 시작 된 우리 민족의 뿌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이곳도 우리 땅인데,
왜라는 의문점을 다시 제기하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겨 본다
웅녀상을 뒤로하고 연길 입구 변두리 마을에 차를 내렸다 상점들이 줄지어 있는데 한국에서 말하는 보신탕 마을이란다
그런데 이곳으로 박작가를 만나러 연길대학의 교수이신 김호웅님 박사님께서 오셨다 박작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박작가를 꼭 만나야한다고 석화 문화원 회장이신 박옥화님께서 모시고 온 것이다
원탁 테이블에 둘러 앉은 사람이 9명이다
음식이 나오는데 보신탕이 전부가 아니다 매운탕 고기 찜 별별 음식이 다 나온다
얼컨하게 어부러진 분위기에 호탕한 성격의 김박사님께서 이야기와 술잔이 오고 갔고
화장실을 물었는데 말로만 들어왔던 옛날 중국인들의 화장실을 보았다
남자는 그렇다고 해도 여인에게는 치욕이 될 것 같은데 여기 식당에는 여자 손님이 없다는 말인가?
김박사님께서 좋은 곳이 있다며
여기까지 왔는데 꼭 들려야 한다고 안내하는 곳이 중국조선족생태문화원이다
넓다란 공원으로 만들어진 문화원에는 조선족 예술인들의 비석과 예술작품이 전시 되어 있다
김학철 시인의 비석 앞에서 사진 한 컷으로 마지막 석별의 정을 나눈다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고 있다
전화가 왔다 최옥남 교수님이시다 저녁을 준비했다고 꼭 식사를 하고 가라고 한다
석화 선생님께 양해를 구했다 지금까지 너무 고마웠던 분이다 작별인사로 포옹을 했다 한국 오시면 꼭 연락을 주시라고 다짐을 하고 이별을 고한다
호텔 로비에서는 최교수님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를 달려 도착한 곳은 아파트 7층인데 작은 사무실로 꾸며져 있다
茶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교육하는 교육장이라고 한다 두 명의 여성분이 미리 음식 준비를 해놓고 반가이 맞는다
또 만찬이다 점심을 늧도록 포식하고 늧게까지 술자리를 한 탓에 준비 된 음식 상 앞에 앉으니 걱정이 앞선다 우리를 위해 준비한 이 음식 맛있게 먹어야 하는데 어쩌나~ 배를 두드려 보지만 도리가 없다 일단 양해부터 구하고 대화를 앞세워 음식은 천천히 먹기로 했다
자리를 함께 한 최교수님 친구분들의 소개가 있었는데 모두가 연길의 쟁쟁한 인사라고 하면서 연길 보험회사 총 책임자라는 분과 연길은행의 높은 직분을 가진 분이란다 그런데 특이한 분은 건축사 감리로 일 하신다는 분이 계셨는데 여자의 신분으로 건축현장의 높은 빌딩 건물의 감리를 한다는게 의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적당량의 음식을 먹고 내일의 먼 여정을 위해 자리를 일어섰다
내일은 고속 열차로 심양으로 가야한다
심양은 여기 연변 끝자락에서 동북 쪽에 있는 만주 지역의 가장 콘 도시로 거리가 두만강에서 부산. 그러니까 한반도 끝에서 끝이라고 보면 된다
선물로 흑차 두 봉지를 나누어 주면서 이별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내일 호텔로 차를 보네 주신단다
서지월 시인의 제자라고 소개 받았는데 우리와는 처음 만나는 인연인데 이도백화에서 부터 환영행사 그리고 오늘 또 내일까지 이런 정성을 어찌 표 해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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