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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춘기와 동행하며 생각·감정 관성 탈출기 #3

낯선 나에게 익숙해지기 - 1화. 임플란트와 갱춘기


갱년기가 아닌, 갱춘기: 치과에서 시작된 새로운 삶의 서막


내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는 나이 오십여덟. 사람들은 이 시기를 '갱년기'라 부르며 삶의 쇠락을 논하지만, 나는 이 시간을 '갱춘기'라 정의한다. 사춘기와 다른 인생의 오춘기, 멈춰 서서 기존의 생각과 감정을 마주하고 50대와 60대의 경계를 세울 용기가 필요한 시기. 몸과 마음에서 낡고 못쓰게 된 것들을 과감히 비워내고 새로운 것으로 채울 자기 결정권이 필요한 시기다. 내게 그 갱춘기의 시작은, 다름 아닌 치과 의자의 차가운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날이었다. 노년을 건강하게 보내기 위해 제대로 씹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이성적인 판단보다, 망가진 치아를 타인에게 보일 때마다 선택했던 수치심(필자의 상상 '망가진 치아를 보고 사람들이 비웃겠지? 치아를 보이지 말자...')과 두려움(필자의 상상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학생들에게 이빨 잘 닦으라고 가르치면서 자기 치아는 관리도 못했네…라고 비난하는 상상 속 목소리’)이 직장 일로 바쁘다는 핑계를 만들었다. 게다가 3년 전부터 치아 상태가 급격이 나빠지며 사람들 앞에서 활짝 웃지도 못했다. 결국 더 이상 미루면 씹지 못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타인 앞에서 선택했던 수치심보다 더 커졌고, 비로소 스스로의 의지로 치과를 찾았다.



삶이 청구한 3천만 원의 고지서, 솔직함이 빚어낸 용기


2025.5.30. 금요일, 치과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했다. 윗니가 깨지고, 아랫니가 흔들려 더 이상 음식을 씹을 수 없는 상태임을 간호사에게 실토하고 방문일정을 잡게 되었다. 교원이라는 사회적 지위는 이런 수치스러운 상담을 하기까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비대면 상담이라 그나마 솔직히 말할 수 있었다. 상담을 위해 들어선 치과 병원. 소독약 냄새와 치과 특유의 기계음은 마치 지난 세월의 방치와 불성실함을 꾸짖는 경고처럼 몸을 긴장시켰다. 11년 동안 마라톤과 근력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어 건강하다는 착각에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던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 그 착각은 겉으로만 멀쩡한 사상누각이었고, 이제 치주가 무너졌듯이 그 누각의 밑동이 서서히 무너지며 갱춘기와 동행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치아 초음파 촬영 후 상담사와 현재의 치아 상태, 이후 치과 수술에 대한 전반적인 상담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치아 관리를 소홀히 한 필자를 꾸짖을 것이라는 상상이 깨졌다. 친절했고, 오히려 치아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치료를 결정한 부분을 응원해 줬다. 정신적으로는 위로를 받았지만 경제적 부담은 컸다. 3천만 원에 가까운 그 금액은 단순히 임플란트 비용이 아니라, 지난 58년의 삶이 청구한 정직하지만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눈물 젖은 고지서였다. 열심히 일 한 만큼 보상을 받지는 못할망정 건강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더 크게 느껴져 눈물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감정 상황에서도 필자는 경제적 부담이 되니 깎아달라고 흥정을 했다. 돈과 건강은 별개였나 보다. 돈 앞에서 만큼은 끝까지 비루했다. 갱춘기의 첫 번째 관문은 이처럼 상당한 용기가 팔 요한 현실적 상황이었고 돈 앞에서는 비루했다.


치과 수술이 시작되었다. 마취 주삿바늘이 잇몸을 뚫고 들어올 때의 찌르는 듯한 통증. 그건 내 몸이 내게 던지는 가장 날카로운 경고였다. 그러나 진정한 고통은 그때부터였다. 고주파를 내며 회전하는 전동 드릴 소리, 치아가 갈리는 끔찍한 냄새. 그 모든 것은 나를 향한 준엄한 심판처럼 느껴졌다. 아프다고 하면 마취제를 더 놓아주었지만, 몸의 통증이 사라질수록 마음의 아픔은 더욱 깊어졌다. ‘그래, 이 벌을 달게 받자. 그동안 너 자신을 홀대한 대가다.’ 속으로 되뇌며 나는 의사에게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는 내 치아를 깎아내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소홀하고 오만했던 나를 단죄하는 심판관이었다. 이 고통스러운 해체 과정이야말로 갱춘기의 가장 핵심적인 시간이었다. 1시간이 지나도 수술은 끝나지 않았다. 온몸에 힘은 점점 더 들어갔다. 손아귀가 아픈 이유가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주먹을 너무 꽉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리도 아팠다. 오랜 시간 누워있었기 때문이었다. 눈가의 주름도 아팠다. 얼마나 찡그렸으면 그랬을까?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입안의 감각은 희미했지만 들려오는 기계음이 주는 공포가 내 몸을 경직시켰던 것이다. 치과의사가 몸의 힘을 빼라고 하지만 몸에서 힘은 빠지지 않고 오히려 경직의 정도가 심해졌다. 그만큼 모든 상황이 낯설고 두려워 몸이 움츠러든 것이었다. 내 몸을 사랑하고 아껴주지 않고 방치하면 큰 고통이 수반되는 것을 필자의 몸이 알려주고 있었다. 앞으로는 자신을 사랑하는 데 온 힘을 쏟으라고 고통의 크기를 키워왔나 보다.



부서진 치아에서 찾은 용기, 나를 사랑하는 첫걸음


세 시간 동안 이어진 사투 끝에, 나는 거울 앞에 섰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뾰족하게 갈려나간 치아들, 엉망진창이 된 잇몸. 한때 내 입안에서 빛나던 보석들은 이제 프랑켄슈타인의 입처럼 처참하고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치과를 방문하기 이전 과거의 나는 이런 부끄러움을 마주할 용기조차 없었다. 스스로의 약점과 단점을 철저히 외면하고, 오직 잘나고 멋진 나 만을 보려 우월감을 앞세우는 데 급급했다. 남의 인정에 목말라하며 페르소나를 하루에도 12번 이상을 갈아 쓰며 고단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그 가면 아래에 숨겨둔 초라한 민낯이 바로 이 모습이었다. 나의 열등감, 나의 부족함, 나의 솔직하지 못함. 오늘 나는 비로소 그 모든 것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입을 자신 있게 벌려 망가진 치아를 바라보며 그동안의 삶의 흔적에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게 된 것, 이것이 갱춘기에 치과 병원이 내게 준 경제적 부담과 눈물 젖은 첫 번째 선물이었다. 살아오며 감추고 싶었던 낡고 부서진 것을 온전히 직시하며 남으로부터의 인정이 아닌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는 당위성을 찾는 용기.


그럼에도 내겐 여전히 여덟 개의 치아가 남아있었다. 60여 년의 노동과 풍파 속에서도 굳건히 버텨준 충직한 병사들.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고맙던지. 그동안 그들의 신음을 외면하고 함부로 혹사했던 지난날이 사무치도록 후회되었다. 내 것이라는 이유로,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으로, 나는 가장 가까운 존재를 멸시하고 방치했다. 몸이 아프다고 소리쳐도 무시했고, 관계가 깨질 것 같아도 애써 모른 척했다. 이제 나는 안다. 모든 것은 언젠가 떠나고, 모든 것은 노쇠한다는 자연의 순리를. 분노하고 떠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미련은 버리기로 했다. 이제는 남아있는 여덟 개의 충신과 새로이 들어올 동료들을 평등하게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여덟 개의 치아에게는 특별한 보상을 해줄 것이다. 부드럽고 질기지 않은 음식으로 정성스레 돌봐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임플란트들도 보이지 않는 입안에서 서로를 아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 배운 진정한 사랑의 의미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극심한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다. 그때, 곁에 아내가 있었다. 고단한 퇴근길에도 내 치아 상태를 묻고, 앞으로 술과 담배를 끊으라고 조언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떤 보약보다 달콤했다. 1천만 원 이상의 거액을 쾌척하며 치료에만 집중하라는 그 응원. 아플 때나 위기에 처했을 때, 비난 대신 있는 그대로의 도움을 건네는 그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배웠다. 편안할 때는 누구나 잘해줄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의 순간에 마음을 다해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아내에게서 진정한 사랑과 자기희생의 가치를 보았다.


임플란트는 나에게 몸을 꿰뚫는 고통과 함께 영혼의 각성을 선사했다. 돈의 크기 앞에서도 무의미해지는 인간의 고통을 경험했고, 그 대가로 나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용기를 얻었다. 늦게나마 시작된 이 여정은 나 자신에게 정직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며, 그리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아끼는 법을 배우는 길일 것이다. 이제 나는 외부의 인정을 좇는 대신, 내면의 행복을 채워가려 한다. 부끄러운 나 자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 그리고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 시작은 오십여덟에 찾아온 이 치아 치료였다. 내 인생의 가장 정직한 거울이 되어준 그날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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