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은 겉보기에는 평온했다. 그러나 오후 9시 정각, 공영방송의 긴급 속보 자막이 화면을 뒤덮는 순간, 그 평온은 깨져버렸다. 앵커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어 하나하나에는 긴장이 서려 있었다.
“지금부터 공개되는 문서는 정부가 아직 공식 확인하지 않은 자료입니다. 그러나 해당 문서는 미국, 중국, 러시아 3개국이 서명한 것으로 추정되며, 제목은 ‘한반도 공동관리 협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화면이 전환되자, 낯선 회의실의 사진이 잠시 비쳤다. 이어 테이블 위에 펼쳐진 한반도 지도가 클로즈업되며 화면을 가득 메웠다. 지도 위에는 우리가 아는 국경선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낯선 굵은 붉은 선이 새겨져 있었다. 그 선 곁에는 작은 글씨로 ‘관리선’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화면은 구역별로 색을 달리하여 한반도의 운명이 외세에 의해 구획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먼저 평양 외곽과 황해남·북도에는 태극기가 표시되어 있었다. 앵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해당 구역은 대한민국이 관리권자로 명시돼 있습니다.”
이어 화면은 동해 쪽으로 이동했다. 강원도 북부에는 성조기가 떠 있었고, 그 아래에는 ‘국제 안보 관리구역’이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미국이 해당 지역에 군사적 주둔을 유지하고, 독자 통제를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잠시 후 화면은 북쪽 내륙을 비추었다. 평안북도, 자강도, 양강도, 함경남도 전역이 붉은색으로 칠해지며 중국 국기가 표시되었다.
“이 지역은 중국의 전략 관리구역으로 분류돼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도의 가장 위쪽, 바다와 맞닿은 함경북도에는 러시아 국기가 꽂혀 있었고, 동해로 향하는 통로가 화살표로 강조되어 있었다. 러시아가 동해로 진출할 수 있는 통제권을 확보했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화면의 중심으로 다시 초점이 맞춰졌다. 평양은 네 가지 색이 겹쳐진 형태로 표시되어 있었으며, 지도 중앙에는 ‘특별행정구역(4자 공동관리)’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한반도의 심장이 네 개의 외세에 의해 공동 통제되는 구조였다.
앵커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화면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다음 문장을 읽기 위해 숨을 골랐다.
앵커는 다음 문장을 읽으며 잠시 숨을 골랐다.
“각 구역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 관리선 획정 이후 상대국 군의 진입은 제한한다. … 한국군의 모든 군사 작전은 유엔 연합 승인 절차를 통해 조율한다.”
이는 명시적으로 ‘주권 박탈’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한국이 협정의 주체가 아니라, 관리 대상 국가로 분류되었음을 의미하는 조항이었다.
그 순간, 화면 하단에 붉은 글자가 번쩍이며 나타났다.
<한국은 협정 당사국에서 제외됨>
자막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우리를 배제한 채 한반도의 미래가 결정되었다”는 충격적인 현실을 시청자들의 가슴에 쐐기처럼 박아 넣고 있었다.
카페의 손님들은 커피잔을 내려놓았고, 지하철 역사에서는 휴대폰 화면을 가리키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거리의 전광판 앞에서 멈춰 선 시민들은 말을 잃은 채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앵커는 다음 조항을 읽었다.
“‘북한 내 전략 자원의 배분은 분쟁 방지를 위해 사전에 지정된 회원국이 장기 관리한다.’ … ‘인구 이동은 안정화 절차에 따라 단계적으로 시행할 수 있다.’”
통일을 금지한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장기 관리’라는 문구는 통일 논의가 자동적으로 배제되는 구조를 암시하고 있었다. TV 화면이 그대로 고정된 채, 지도 위의 색깔 경계선만이 천천히 깜빡이고 있었다.
잠시 후, 거리 곳곳에서 휴대전화 진동음이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단체 채팅방, SNS, 포털 댓글창에 같은 문장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우리를 뺀 한반도 분할이 현실로 진행되고 있다.”
“이번엔 북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 땅까지 뺏기고 있는 거잖아!”
서울 마포의 주택가.
퇴근 후 TV를 보던 50대 가장은 리모컨을 냅다 던지듯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평양을 네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한다고? 그럼 우리는 뭐야? 평양이 북한 수도고 우리 민족의 중심 도시인데… 이제는 외국들 행정구역이라고? 진짜 이게 말이 돼?”
옆에 있던 아내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발코니 밖으로도 TV 소리가 들렸고, 건너편 아파트에서도 같은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화면을 공유하는 듯한 공포감이 엄습했다.
속초 항구 근처의 선술집.
술에 젖은 얼굴로 TV를 보고 있던 선장이 벌떡 일어섰다.
“러시아가 북쪽 항구를 단독 관리한다는 게 뭔 말인지 아나? 이젠 우리가 동해로 배 띄울 때도, 저 나라 허락받고 나가라는 거잖아!”
그는 잔을 꽉 쥐고 이를 갈았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젊은 어선 선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님 말씀대로라면… 이건 분할이 아니라, 그냥 점령인 것 같습니다. 우리 바다를 우리가 못 쓰게 된다는 거잖습니까.”
난민 수용소에서는 더욱 극적인 반응이 터지고 있었다. 경기도 고양시 체육관. TV를 가리키며 북한 청년이 소리쳤다.
“평양을 공동관리 한다는 건, 우리 수도를 네 나라가 나눠 갖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옆에 있던 여성 난민이 울먹이며 말했다.
“우린 통일이 되면 고향에 돌아갈 줄 알고 버텼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까… 통일도, 고향도 다 남의 손에 넘어가게 생겼네요. 그럼 우리는 또 그냥 기다리기만 해야 합니까?”
체육관의 공기는 이전과는 달랐다. 분열이나 논쟁은 사라지고,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통일해야 한다’는 감정이 아니라, ‘더 이상 빼앗기지 않겠다’는 생존 감각이었다.
TV 화면이 국회 본회의장으로 전환되었다.
“국회 속보입니다.” 앵커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화면 속 의사당은 이미 격렬한 움직임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발언대 주변에는 여야 의원들이 동시에 몰려나왔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분노가 아닌 같은 방향을 향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야당 의원이 먼저 마이크를 움켜쥐었다.
“지금 공개된 문서가 사실이라면, 이는 외교 분쟁이 아니라 대한민국 주권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이 문제는 정당 간 입장이 아니라 국가의 생존을 위한 대응이어야 합니다!”
이어 여당 의원이 단상을 향해 걸어 나왔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모든 시선을 끌었다.
“정부는 즉시 문서의 진위를 확인하고, 한국이 배제된 모든 협의를 무효화할 준비에 착수해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쟁이 아니라, 단일한 국가 대응입니다!”
의장봉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그러나 이번의 울림은 소란을 멈추게 하려는 경고음이 아니라, 국회가 하나로 정리되어 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처럼 들리고 있었다.
서울 종로 거리. 밤 10시가 넘었지만 전광판 앞에는 이미 수백 명의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휴대폰 화면으로 협약 문서의 사진을 띄워 보여주며 소리쳤다.
“이건 북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땅 일부도 관리구역으로 넘어간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몇몇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군복을 입은 예비역 청년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는 통일을 주장한 적도 없고, 정치에 관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흔들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군대는 앞으로 ‘국제 연합 승인 없이는 한 발도 움직일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나라입니까?”
순간, 군중 사이에서 짧은 탄식과 함께 분노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부산역 광장. 어부들과 자영업자들이 TV 화면 앞에 모여 있었다. 화면 속 해양 지도에는 러시아가 통제하는 항만, 중국의 감시 해역, 미국의 해역 보호선이 붉은 선으로 표시돼 있었다.
노 어부가 씹어 삼키듯 말했다.
“우리 바다라면서… 이제는 배 띄우는 것도 눈치 봐야 한다는 거야?”
옆에 있던 젊은 선장이 이를 꽉 물며 고개를 들었다.
“조업 허가가 아니라 출입국 심사처럼 되는 거죠. 우리 영해가 아니라, 남의 바다에서 허락받고 일하라는 뜻 아닙니까.”
말이 끝나자 주변에서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분노는 고성으로 터지지 않았지만, “이건 단순한 분할이 아니라, 숨통을 죄는 점령”이라는 인식이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번져갔다.
경기도 임시 난민 수용소. 북한에서 내려온 청년들이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TV 앞에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저 사람들, 결국 우리를 자기네가 나눠서 가지겠다는 거잖아요.
이제 남쪽 사람들도 알겠죠? 이건 통일이니 뭐니 하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사라지느냐 살아남느냐 싸움이라는 거.”
옆에서 듣고 있던 남한 자원봉사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금은 누가 부담을 지느냐가 아니라, 나라 자체가 없어질 수 있느냐 없느냐 문제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고요함 속에서 체육관 곳곳에서 작은 목소리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우리 땅은 우리가 지켜야지…”
“다시는 뺏기면 안 됩니다…”
광화문 광장. 밤 11시.
누군가의 휴대폰에서 비밀 협약 전문이 낭독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때 군중 사이에서 낮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건 북한 얘기가 아니에요… 대한민국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고개가 들리며 술렁임이 퍼졌다.
“통일이냐 분리냐를 고민할 시간도 없다는 겁니다. 그 결정권조차 외국이 가져가겠다는 거잖아요!”
“우리 땅을 나누고, 우리 군대를 묶고, 우리 미래를 다른 나라가 정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지며, 웅성거리던 목소리는 곧 하나의 방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이번엔 진짜 행동해야 합니다!”
“다시는 속지 않는다!”
구호는 처음엔 작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숨결에 실려 점점 커졌다. 광장은 어느새 태극기와 휴대폰 불빛으로 가득 찼고, 그 흐름은 서울을 넘어 부산, 대전, 광주, 제주로 번져갔다. 각 도시의 밤하늘 아래에서 같은 말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정 직전. 청와대 지하 상황실에는 대통령, 서지훈 국가안보실장, 박태식 합참의장, 외교안보 라인이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봉인 표시가 찍힌 문서 사본과 함께, 위성 화면에는 북한 전역에 그어진 새로운 관리선이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서지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문서의 암호 서명이 확인됐습니다. 미 국방부, 중국 국무원, 러시아 안보회의… 세 기관의 공식 서명 키와 일치합니다. 한국은 협약 당사국 명단에 없습니다.”
회의실이 순간 정적에 잠겼다. 외교수석이 낮게 말했다.
“즉… 우리를 배제한 채 이미 합의가 진행되었다는 뜻입니다. 문서의 진위는 거의 확실하다고 판단됩니다.”
박태식 합참의장이 이어받았다.
“분할 통제선 표시와 일치하게, 각국의 병력도 북부 지역으로 재배치되고 있습니다. 군 정찰위성 영상과 현장 정보가 모두 동일한 흐름을 보여줍니다.”
대통령은 문서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용히 말했다.
“이건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닙니다. ‘한반도 전체’를 외국이 장기 관리하겠다는 선언입니다.”
그 순간, 상황실의 모니터에 전국 생중계 화면이 동시에 전송되었다. 광화문, 부산역, 평양 인근 난민 방송소… 모두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배제되지 않는다>
<주권은 양도가 아니다>
서지훈이 마지막 보고를 올렸다.
“대통령님, 정부가 결론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국민 여론은 이미 ‘한쪽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국회는 긴급 공동 결의안을 준비 중입니다.”
대통령은 고개를 들며 낮게 말했다.
“국민은 방향을 정했습니다. 이제 정부는 그 방향을 실행할 방법을 논의해야 합니다.”
회의실 공기는 숨조차 내쉬기 힘들 만큼 무거워졌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음 회의는, 대한민국의 향후 100년을 결정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