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문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서점 한쪽에 조용히 놓여 있는 힐링 에세이들, 마음을 다독여주는 강연, 잠시 멈추어 나를 돌아보라는 문장들. 어쩐지 인문학이 사람의 마음을 달래는 작은 방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책 모임에서 나누는 이야기들도 대체로 개인의 감정과 삶의 고민에 머문다.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묻기보다, 오늘의 나를 어떻게 다독일지가 먼저 말해진다.
그러나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말하는 인문학이란 것이 정말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우리 사회가 인문학을 편하게 다룰 수 있는 작은 틀 안에 가두어 온 것은 아닐까? 가만히 바라보면 지금의 인문학은 지나치게 개인화되어 있다. 국가와 사회, 기술과 문명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린 채, 마음을 쓰다듬는 취미 영역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원래의 인문학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고대 세계에서 철학은 과학이었고, 과학은 철학의 일부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자이면서 정치학자였고, 시학을 연구하면서 논리학을 세웠다. 그 시대에는 인간을 탐구하는 모든 활동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문학도, 역사도, 예술도, 자연 탐구도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인문학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경계가 흐릿하고 넓은 세계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쓰는 ‘인문학’이라는 말은 사실 근대 대학에서 만들어진 분류였다. 철학, 문학, 역사, 언어학을 한 묶음으로 다루기 위해 필요했던 이름.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말이 시간이 지나며 더 좁아지고 더 가벼워졌다. 철학은 감정 치유로, 문학은 자기 성찰의 도구로, 역사는 종종 사건을 가볍게 훑는 교양 정도로 소비되었다. 그러는 사이 인문학은 인간의 성찰에서 출발해 사회적 문제와 정치·경제의 흐름, 더 나아가 국가의 방향을 묻던 넓은 질문들을 점점 내려놓게 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 배경에는 한국이 지나온 독특한 근현대사가 있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의 동시에 통과한 나라이다. 국가가 빠르게 성장해야 했던 시기에, 대학은 공학·경영·의학 같은 실용학문을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인문학은 자연스럽게 ‘취업과 거리가 먼 학문’으로 밀려났다.
시험 중심 교육도 한몫했다. 문학은 분석과 암기로, 역사는 연표로, 철학과 윤리는 선택 과목으로 조각났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인문학은 ‘깊이 탐구해야 하는 학문’이 아니라 ‘점수로 측정되지 않는 주변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적 실용성이 학문의 기준이 되던 시절, “무슨 과를 가야 취직이 잘 될까”라는 질문 앞에서 인문학은 자연스럽게 뒤순위가 되었다.
여기에 사회적 불안까지 더해졌다. 빠른 성장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개인들은 ‘나를 이해하고 위로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문학을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인문학은 본래의 넓은 뜻을 잃고, 개인의 심리와 감정을 다루는 가벼운 콘텐츠로 소비되었다. 짧은 요약, 쉬운 해설, 유튜브 철학 채널, 한 장짜리 교양서들이 인문학의 얼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모든 요소가 겹치면서 한국에서 인문학은 본래의 깊이와 폭을 잃고, 실용학문 옆에서 조용히 감정을 다독이는 작은 방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모습이 인문학의 전부일 리는 없다. 인문학은 원래 인간의 의미를 탐구하고, 사회의 방향을 묻고, 기술 시대 문명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훨씬 넓은 세계였다. 우리는 그 세계를 어쩐지 조금 놓쳐 온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을 보면 기술이 먼저 달리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느라 숨이 찰 때가 많다. 인공지능은 판단의 속도를 넘어 의미를 해석하려 하고, 유전자 편집 기술은 생명을 ‘설계 가능한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감시 기술은 일상을 재단하고, 플랫폼 경제는 관계의 방식까지 바꾸고 있다. 정치는 빠르게 변하는 세계 질서에 흔들리고, 경제는 기술과 자본의 흐름에 맞춰 하루가 다르게 방향을 바꾼다.
이 거대한 변화 속에서 가장 들리기 어려운 질문들이 있다.
“이 방향이 옳은가?”
“우리는 어떤 삶을 만들고 싶은가?”
“국가와 사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원래 인문학이 던지던 질문들이다. 그런데 지금의 인문학은 그 목소리가 다소 작아졌다. 감정과 위로에 머무르며 개인의 문제만 이야기할 뿐, 정치의 방향, 경제의 구조, 국가의 선택, 기술의 윤리 같은 큰 질문 앞에서는 조금 비켜선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하지만 과거의 인문학은 이보다 훨씬 넓었다. 인간의 의미, 사회의 구조, 권력의 사용, 기술의 책임. 모든 것을 함께 묻는 큰 지붕이었다. 철학은 과학과 나란히 걸었고, 정치는 윤리의 토대 위에서 논의되었으며, 경제는 인간 공동체의 삶을 어떻게 꾸릴지 고민하는 학문이었다.
그 시절에는 학문의 경계가 지금처럼 단단히 나뉘어 있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물학을 연구하면서 정치철학을 말했던 것도, 역사가 자연스럽게 경제와 권력을 함께 다루었던 것도, 사람과 사회, 자연과 기술을 하나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라는 말조차 필요 없을 만큼, 모든 학문은 인간과 세계를 함께 탐구하는 넓은 공간에 있었다.
그 넓은 공간은 한국에서 더 빠르게 좁아졌다. 압축 성장은 실용성을 기준으로 학문을 재단했고, 시험 중심 교육은 문학·역사·철학을 서로 연결되지 못한 채 흩어 놓았다. 그러는 사이 인문학은 개인의 성찰과 심리의 작은 영역에 머무르게 되었고, 정치·경제·기술·국가의 방향을 묻는 큰 질문들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지금은 그 빈자리가 점점 크게 느껴진다. 기술은 삶을 새로 쓰고, 정치는 국가의 역할을 다시 규정해야 하며, 경제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새로운 기준을 찾아야 한다.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결국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을 다시 묻고 이어 줄 수 있는 학문은 여전히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인문학은 이제 작은 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개인의 감정과 성찰을 넘어서 사회와 국가, 기술과 경제, 공동체와 문명 전체를 바라보아야 한다. 과학과 정치, 기술과 경제의 논리에 질문을 던지고, 그 결정들을 인간의 언어로 다시 해석해 주는 더 넓은 인문학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하는 인문학은 과거처럼 경계가 허물어진 학문이다. 과학과 기술 위에 철학의 질문이 놓이고, 정치와 경제의 결정 뒤에 인간의 가치가 자리하며, 국가의 방향이 기술적 계산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기준 속에서 다듬어지는 구조 말이다.
인문학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 작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이제 그 작은 방에서 나와, 과학·기술·정치·경제·국가의 모든 흐름을 함께 품을 수 있는 넓은 지붕으로 다시 세워야 한다. 그 지붕 아래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과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차분히 다시 물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