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32 : 용주의 이야기
하루가 끝나갔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낡은 술집의 눅진한 공기 속에서,
용주 형은 잔을 기울이며 지난 세월의 그림자를 더듬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에덴 보육원 화재… 솔직히 그 뒤는 기억이 없어.
눈 떠보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지.
누가 날 구해줬는지,
어떻게 병원까지 왔는지,
아무것도 몰랐어.
그냥… 혼자였지.
퇴원하고 나서는 다른 보육원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지냈어.
앞이 보이지 않는 몸으로 세상에 나오니, 진짜 막막하더라.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껌을 팔고, 구걸하며 하루하루 버텼어.
사람들 눈은 차갑고, 세상은 날 얼려 죽이는 것 같았지.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은 진짜 지옥 같았어.
발 밑의 차가운 보도블록, 코끝을 스치는 지하철의 썩은 냄새,
그리고 귀를 때리는 무수한 발소리들.
귀는 밝아지는데, 세상은 더 큰 벽처럼 느껴지더라."
용주 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손에 든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허공을 응시했지만,
그 눈동자에는 그 시절의 고통이 선명하게 비치는 듯했다.
그는 다시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날도 지하철에서 껌 팔고 있을 때였어.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순간, 심장이 발바닥까지 떨어지는 줄 알았어.
놀라서 손 놓으라고, 경찰 부르겠다고 협박했는데,
아무 대꾸 없이 날 어딘가로 이끄는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세던지,
꼼짝도 못 하고 끌려갔어.
낯선 곳으로 끌려가는 동안, 머릿속은 완전 엉망이었지.
어디로 가는 건지, 누가 날 데려가는 건지.
몇 번 코너를 돌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느낌이 이어졌어.
발 밑의 감촉이 달라지고, 시끄럽던 소리도 점점 멀어지더니,
갑자기 조용해지더라.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그가 드디어 입을 뗐어.
'형! 나 태경이야. 유태경. 기억나지? 에덴 보육원.'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세상에 다시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어.
아니, 빛 이라기보다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 잃고 헤맬 때,
저 멀리서 비추는 희미한 등대 불빛 같았지.
그 순간의 안도감 이란… 세상 모든 걸 다 얻은 것만 같았어.
어둠 속에서 나를 알아봐 주고, 내 이름을 불러주는 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구원받은 기분이었어.
반가운 마음에 당연히 기억한다고,
너랑 나랑 도꾸랑 우리 삼총사였잖아, 왕따 삼총사! 하고 소리쳤지.”
“태경이는…
내겐 정말이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어.
지하철 바닥의 차가운 냉기와 사람들 무관심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나에게,
따뜻한 온기를 가져다주었어.
당장 잘 곳도 마련해 주고,
무엇보다… 다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각막 이식 수술까지 해주었지.
수술대에 누워 마취에 잠들 때,
나는 태경이 한테 내 모든 걸 맡겼어.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흐릿하게나마 다시 보이는 세상은…
기적과도 같았어.
세상의 색깔과 모양이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나는 태경이 한테 평생 빚을 졌다고 생각했어.
어디 그뿐이야?
나를 이런 번듯한 직장에, 에덴클린 과장이라는 이름으로 취직까지 시켜주었지.
내가 이런 자리에서 일할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
버려진 몸으로 살아가던 나에게
태경이는 새로운 삶을 선물해 준 거야.
내게 태경이는… 살아갈 이유이자,
믿고 따를 유일한 신 같은 존재야."
용주 형은 말하는 내내 태경에 대한 깊은 신뢰와 감사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나에게 한마디 인사도 없이 갑자기 회사를 그만둬 버렸어.
오늘 태경이랑 같이 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의 얼굴에 섭섭함과 아쉬움의 표정이 배어 나왔다.
"그나저나… 도꾸 너랑 기철이가 원래 이렇게 사이가 좋았었나?
둘이 같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영 낯설다."
그의 말에 나와 기철이는 어색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너무 복잡하고 난처한 일이었다.
용주 형은 우리의 표정을 읽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나한테 용건이 있어서 온 것 같지는 않고…
에덴 솔루션에는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기철이와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렵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태경이의 배신,
코끼리 바위의 유물,
그리고 한초희가 남긴 명함까지.
용주 형은 연신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우리의 이야기에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가 끝난 후, 용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태경이가 내게도 몇 번 코끼리 바위니, 유물이니 하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어.
하지만… 태경이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도 믿기 힘들지만,
설령 진짜 태경이가 그랬다 하더라도 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야.
태경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나는 아무 도움이 못 될 것 같다. 미안하다."
용주 형의 단호한 말투에 우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형, 그럼 내 질문 하나만 할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태경이 에게 해가 될지 아닐지는 형이 판단해.
그리고 해가 되지 않을 것 같다면 솔직하게 말해줘."
용주 형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물어봐."
"야나기 케이…
그러니까 태경이는 일본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거야?"
용주 형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잡혔다.
"글쎄… 솔직히 '야나기 케이'라는 태경이의 일본 이름도 오늘 너에게 처음 들었어.
그리고 나는 에덴 솔루션 직원이 아니라, 에덴클린의 청소 용역 업무를 맡고 있어서
에덴 솔루션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잘 몰라.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몰라.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하다."
그의 미안하다는 말에 우리는 더욱 답답해졌다.
기철이가 거들었다.
"형,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줘.
혹시 회사를 들락날락거리는 일본인을 봤다거나…
아니면 일본 회사 차를 봤다거나…."
용주 형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오래된 서랍 속에서 잊힌 물건을 찾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쓰레기통을 비우다가 '이시하라 고미술 갤러리'라는
이름이 적힌 서류를 몇 번 본 것 같은 기억이 나.
에덴 솔루션은 IT회사인 걸로 아는데
일본 고미술 갤러리 서류가 왜 여기 있지 하고 궁금하긴 했어.
이게 도움이 되려나 모르겠다."
그의 말에 내 머릿속에서 '이시하라 고미술 갤러리'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한초희가 남긴 명함과, 용주 형의 희미한 기억이
하나의 점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용주 형은 우리의 복잡한 표정을 살피더니, 다시금 잔을 채우며 말했다.
"우리 이제 이런 시시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면 안 될까?
옛날이야기나 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술자리는 계속되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이시하라 고미술 갤러리'라는 이름이 떠나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