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33 : 새로운 목적지
한 잔 더 하러 가자는 용주 형을
오늘만 날이냐 조만간 또 보자며 달래고 술집을 나섰다.
싸늘한 새벽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뜻밖의 만남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한 가지 의문이
거미줄처럼 머릿속을 감싸기 시작했다.
에덴 솔루션에서 비서로 근무했던 한초희,
그리고 현재 에덴클린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용주 형.
에덴 보육원이라는 과거로 묶인 이 두 사람이 모두
유태경이 CEO로 있었던 '에덴'이라는 이름의 조직과 관련이 있다.
이게 과연 단순한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뇌리에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태경이는 용주 형으로부터 코끼리 바위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초희는 무슨 이유로 가까이 두었을까.
유태경, 대체 무슨 또 다른 비밀을 숨긴 걸까.
머릿속으로 그동안의 일들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창 밖으로 희미한 여명이 밝아왔다.
감당하기 힘든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막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산산조각 냈다.
기철이었다.
"야! 너 자냐? 나는 궁금하고 답답해서 도저히 잠이 안 와.
지금 바로 너희 집으로 갈 테니까,
우리 이시하라 고미술 갤러리인지 뭔지, 그거 한 번 파보자!"
그의 목소리에서는 잠 한숨 자지 못한 사람 특유의 초조함과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피곤했지만, 그의 열정에 이끌려
"그래, 그러자." 하고 대답했다.
어차피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깨버린 상태였다.
잠시 후, 기철이가 도착했고
우리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이시하라 고미술 갤러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시하라 고미술 갤러리 (石原古美術)
주소: 東京都中央区銀座7丁目8-12 銀座美術ビル 1階
(도쿄도 주오구 긴자 7초메 8-12 긴자 미술 빌딩 1층)
전화번호: 03-6789-1693
갤러리 정보: 1962년에 설립된 이시하라 고미술 갤러리는 50여 년의 오랜 역사와 명성을 지닌 유서 깊은 곳입니다. 초대 설립자인 이시하라 켄타로(石原 健太郎)의 뒤를 이어, 현재 그의 아들 이시하라 켄지(石原 健二)가 2대 관장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주로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그림, 조각상 등 귀한 고미술품들을 정갈하게 전시하며 그 가치를 빛내고 있습니다.
"젠장, 이 걸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잖아.
직접 일본으로 가 관장이라는 이시하라 켄지라는 사람을 만나봐야 하는 거 아니야?"
기철이 답답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눈빛은 이미 비행기 표를 끊을 기세였다.
나는 일단 전화부터 해보자는 생각에 검색 정보에 나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너무 이른 시간인 탓인지,
수화기 너머에서는 연결음만 길게 이어질 뿐 응답이 없었다.
어차피 통화가 된다 하더라도 나도 기철이도 일본어를 할 줄 모르니,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막막했다.
학창 시절에 일본어 공부를 좀 해둘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일단 우리가 알고 싶은 것들을 일본어로 번역해 두자."
내가 제안했다.
기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종이와 펜을 들고, 일본어로 번역할 질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혹시 야나기 케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 에덴 솔루션과 이시하라 고미술 갤러리는 어떤 관계입니까?
* 야나기 케이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 야나기 케이에 대해 알고 계신 정보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우리는 이렇게 네 가지 정도의 질문을 추려 일본어로 번역한 뒤,
갤러리 개장 시간에 맞춰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뒤, 젊은 일본인 여성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곤니치와, 이시하라 고비주쓰 갸라리이 데 고자이마스. 도노 요오나 고요오켄 데쇼오카?"
(안녕하세요, 이시하라 고미술 갤러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멍청하게도 이시하라 켄지 관장이 바로 전화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내 머릿속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당황하여 준비했던 일본어 문장을 잊어버리고,
"이시하라 켄지 상… 플리즈…"라는 말만 반복했다.
안내 직원인 듯한 여성은 알아듣지 못할 일본어로 공손히 몇 마디를 이야기를 하더니,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기철이 답답하다는 듯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
“이시하라 켄지, 켄지상 오네가이 시마스.”
라고 연신 큰소리로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했다.
젠장.
이렇게 되면 결국 직접 이시하라 켄지 관장을 만나러 가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기철이는 뜻밖의 일본 여행에 살짝 들뜬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