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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

챕터 34 : 도쿄, 이시하라 고미술 갤러리

by BumBoo

도쿄행 비행기는 푸른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한국의 복잡한 실타래 속에 얽매여 있었다.


기철이는 옆자리에서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나는 창 밖으로 펼쳐지는 구름의 바다를 응시하며


다가올 미지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서툰 일본어로 이시하라 켄지 관장과 어떻게 대화를 풀어나갈지,


태경이의 실체에 얼마나 다가설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비행기의 규칙적인 진동만이 불안한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는 듯했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 도쿄 시내로 향하는 길은


마치 거대한 미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빌딩들,


복잡하게 얽힌 지하철 노선도,


그리고 낯선 일본어 간판들이 거대한 도시의 무관심을 대변하는 듯했다.


구글 지도에 의존해 겨우 긴자의 한적한 골목 안쪽,


검색으로만 보았던 그 건물을 찾아냈을 때,


안도감과 함께 묘한 긴장감이 밀려왔다.


검은색 목재 문과 회색 벽돌이 어우러진 건물은


예상했던 대로 차분하면서도 고고한 분위기를 풍겼다.


입구에 걸린 작은 간판에는 한자로 '石原古美術'이라 적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외부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차단되고 은은한 향과 함께 고요한 정적이 우리를 감쌌다.


내부는 예상보다 넓고,


은은한 조명 아래 오래된 미술품들이 정갈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었다.


메인 전시실은 고요했고, 접수 데스크는 비어 있었다.


그 앞에서 잠시 서성였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고요함 속에서 우리의 발소리만이 갤러리 바닥에 희미하게 울렸다.


잠시 후, 안쪽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들렸지만,


이시하라 켄지 관장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갤러리 안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대부분 한국의 고미술품이었다.


특히 신라시대의 유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에 탄성을 내뱉었다.


매끄러운 곡선미를 자랑하는 신라 토기들,


섬세한 금세공 기술이 돋보이는 금관의 복제품,


그리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불상들.


그들은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저 아름답다고 감탄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서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도대체 이 귀한 신라 유물들이 왜 한국이 아닌 일본,


그것도 긴자의 한 갤러리에 이토록 많이 전시되어 있는 것일까.


나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혹시… 이 유물들이 노도술이 일본으로 팔아넘긴 그 유물들인가.


그 가능성에 심장이 차갑게 조여왔다.


유물 하나하나에 얽힌 피와 땀,


그리고 비극적인 역사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때 백발의 노인 한 분이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꼿꼿이 세운 채 단정한 기모노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흑단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그의 움직임은 나이답지 않게 절도 있고 유연했다.


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패어 있었지만,


부드러운 인상 속에 감춰진 눈빛은 날카로웠다.


마치 잔잔한 호수 속에 숨겨진 날 선 칼날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함이 번뜩였다.


그는 우리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칸코쿠카라 와타시오 타즈네테 코라레타 카타가타데스카??"

(한국에서 저를 찾아오신 분들입니까?)



뜻밖의 질문에 우리는 잠시 멍 해졌지만,


'한국'이라는 단어를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놀랍게도 유창한 한국어로 입을 열었다.


그의 한국어는 서울말에 가까웠고, 억양도 자연스러웠다.



"제가 이시하라 켄지입니다.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습니까?”



우리의 놀란 표정을 읽고 그가 덧붙였다.



“어머니가 한국 분이셨습니다. 그 덕에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죠"



나는 그의 예상치 못한 한국어 실력에 놀랐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야나기 케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켄지 관장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 스치는 찰나의 동요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한번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이야기하기 적절치 않습니다. 관장실로 가서 이야기 나누시죠."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단호한 명령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갤러리 안쪽, 더욱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우리는 그의 안내에 따라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관장실은 갤러리 본관과는 또 다른 화려함으로 가득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고색창연한 그림들,


유리 진열장 안에 놓인 휘황찬란한 금빛 유물들,


그리고 고풍스러운 가구들까지.


한눈에도 고귀한 가치를 지닌 미술품들이 사방에 빼곡했다.


고요한 공간을 채우는 은은한 향과 함께 이 모든 화려함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신라의 금관 못지않은 일본의 황금 유물들이 번쩍이는 빛을 내뿜었고,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도자기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 화려한 고미술품들에 정신이 팔려, 마치 홀린 듯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내 눈이 한 유물에 고정되는 찰나,


옆에 서 있던 켄지 관장이 짚고 있던 흑단 지팡이에서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칼을 빼 들었다.


차가운 칼날이 번개처럼 움직여 나의 목에 겨누어졌다.


금빛 유물들의 화려한 빛이 칼날 위에서 섬뜩하게 반사되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나를 꿰뚫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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