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35 : 이시하라 켄지의 이야기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나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내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무슨 일로 케이 상을 찾지?"
켄지 관장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의 질문 속에는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나는 목에 닿은 칼날의 차가운 감촉에 저절로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우리는… 야나기 케이의… 보육원 동기입니다.
최근… 연락이 끊겨 수소문하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켄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의 칼날이 아주 조금,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여전히 나를 꿰뚫어 볼 듯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보육원 동기라…."
그의 목소리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비웃음과 경계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그와 에덴 보육원에서 함께 자랐습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칼날이 완전히 거두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아버지가 부도로 자취를 감추고,
어머니마저 그 충격으로 세상을 등졌을 때,
케이는 홀로 보육원에 던져졌습니다.
그가 삶의 끈을 놓으려 할 때, 저희는 그의 곁에서 그 절망을 함께했습니다.
만약 그때 저희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그 또한 어머니의 비극적인 발자취를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내 말을 듣는 순간, 켄지의 눈빛에 미세한 동요가 일어났다.
칼날이 완전히 거두어지고,
그는 천천히 지팡이 속으로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찰칵' 하는 금속음이 고요한 관장실에 울려 퍼졌다.
그는 팔짱을 끼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읽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직접적인 위협은 사라졌다.
"그의 부모님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었죠?"
켄지는 나지막이 물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육원 시절 케이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비밀이 없는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당신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케이 상은… 쉽게 자신의 패를 드러내는 인물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말이 사실인지,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그는 품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익숙한 화면을 몇 번 터치하더니, 짧은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가 답장을 보내오면, 당신들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있겠지요.
그동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관장실 안은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정적은 이전과는 다른, 팽팽한 긴장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켄지 관장의 휴대전화는 마치 고요 속에서 잠든 맹수처럼 침묵했다.
언제 깨어나 우리에게 이빨을 드러낼지 알 수 없었다.
태경이의 답장이 도착하는 순간,
그 메시지가 우리를 '경계하라'는 모호한 경고가 될지,
아니면 '그들을 처리하라'는 단호한 지시가 될지,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들었고,
심장은 발밑에서부터 조여 오는 듯했다.
나는 침착함을 가장하며 갤러리 안의 유물들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특히 신라 유물들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관장님, "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곳에 전시된 유물들은 정말이지… 그 기품이 남다릅니다.
특히 신라의 유물들은… 그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더군요.
저는 사실, 고미술에 대해 아주 깊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신라의 금관이나 토기들을 보면, 그 정교함과 우아함에 절로 감탄이 나옵니다.
금관의 섬세한 금세공 기술과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
그 끝에 달린 작은 새 모양 장식들은 정말 놀라운 예술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토기들, 특히 말 탄 사람 모양 토기나 오리 모양 토기는
그 투박함 속에 해학이 담겨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듯합니다."
나는 학창 시절 배웠던 신라 시대에 대한 모든 지식을 끄집어냈다.
켄지 관장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는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호오, 젊은 사람이 고미술에 이토록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니 놀랍군요.
특히 신라 유물에 대한 이해가 상당합니다.
금관의 세공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요.
그리고 토기들도… 그 투박함 속에 담긴 생명력은 오늘날의 기술로도 재현하기 어렵습니다.
혹시… 고미술을 정식으로 공부하신 적이라도 있습니까?"
나는 그의 호기심에 부응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저 독학으로 조금씩 알아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런 귀한 작품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자니, 그 감동이 더욱 깊어집니다."
신라 고미술에 대한 나의 지식이 그의 호감을 산 듯했다.
그의 눈빛에서 경계심이 한 꺼풀 벗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화의 분위기가 조금 편안해졌다.
"관장님 갤러리의 역사가 꽤 깊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1대 관장님이신 이시하라 켄타로 님께서는 대단한 분이셨다고요."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켄지의 얼굴에 자부심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1962년에 이 갤러리를 설립하셨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고미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특히 경주 고분으로부터 유물들을 '발굴'하여
일본인들이 신라시대 유물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도록 기여하셨죠.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하셨다고 자부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나는 그가 정말이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발굴'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어두운 진실이 내 속을 뒤집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애써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한 분이셨군요.
그런 분의 아드님이시니, 관장님께서도 그 명성을 이어받으셨겠습니다.
그런데… 야나기 케이와는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나는 어렵게 야나기 케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켄지 관장은 다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아련한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다.
"케이 상의 조부, 야나기 칸조 님과 저의 부친 이시하라 켄타로 님은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서로의 사업을 함께 일구어 나간 동지였죠.
케이 상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다시피 했을 때,
부친께서 그를 거두어 키우셨습니다.”
“태경, 아니 케이의 할아버지 칸조 상은요?
왜 친할아버지가 데려가지 않은 거죠?”
기철이 궁금하다는 듯 불쑥 끼어들었다.
“칸조님은 불행하게도 케이 상이 부모님을 잃었을 무렵 이미 세상에 안 계셨죠.
그래서 저의 부친께서 그를 돌본 겁니다.”
이시하라 켄타로의 인품을 추켜세우며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자,
켄지 관장의 얼굴에는 흡족함이 떠올랐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과거의 실타래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칸조 님은 이 일본 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믿고 같이 일하던 '조센징'에게 살해당했다고 했습니다.
부친께서는 그 소식을 듣고 몹시 안타까워하셨고
매년 그의 기일마다 케이 상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조센징은 칸조 님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때, 내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모든 조각들이 한순간에 맞춰지는 듯했다.
야나기 케이의 친할아버지, 도굴꾼 야나기 칸조.
그리고 그의 동업자이자, 칸조를 살해하고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는 '조센징',
바로 노도술 원장.
태경이의 입장에서 노도술은 단순한 원수가 아니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가고 가문의 유산을 강탈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숙적이었을 것이다.
순간, 피범벅이 된 채 칼을 들고 나를 응시하던 태경이의 모습이 섬뜩하게 뇌리를 스쳤다.
그의 눈빛에 서려 있던 광기와 집착은 단순히 유물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원한을 갚고, 빼앗긴 유산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복수심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친할아버지 야나기 칸조가 노도술에게 빼앗긴 모든 것을,
손자인 자신이 되찾아 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때,
팽팽한 침묵을 깨고 날카로운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