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38 : 치명적인 연기
시간은 이미 그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며칠, 아니 몇 주가 흘렀는 지도 모른다.
집 안은 퀴퀴한 절망의 냄새로 가득했고,
창 밖의 햇살은 더 이상 아무런 온기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나는 폐인이었다.
씻지 않은 몸에서는 꿉꿉한 냄새가 났고,
비어버린 위장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잠들지 못해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 뒤로
뇌는 잔혹한 과거를 반복 재생하며 나를 고문했다.
나는 그저 침대에 누워 천장 만을 응시하거나,
멍하니 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손 안의 모든 것이 모래처럼 빠져나가 버린 듯,
나의 삶은 태엽이 끊긴 시계처럼 멈춰 있었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쏟아지는 이미지와 소리들은 의미 없는 파편들로 흩어질 뿐,
내 의식 속으로 침투하지 못했다.
불어 터진 라면을 기계적으로 입에 넣었다.
이미 생명이 없는 몸뚱이를 살리려는 손과 입의 힘겨운 노력 같았다.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앵커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화면 속 인물들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멀리 떨어진 세상의 이야기였다.
"다음 소식입니다. 검찰은 오늘 오전 9시, 한울그룹 정수현 대표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였습니다.
정 대표는 지난 2년간 총 일곱 차례에 걸쳐 신종 마약을 투약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한울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한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정 대표의 비위 사실을 철저히 수사하여…."
화면 속 앵커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구속영장 청구', '혐의', '수사'…
그 단어들이 뇌리에 박히는 순간, 내 안의 무기력은 산산이 부서졌다.
깨달음은 마치 칠흑 같은 어둠을 찢는 섬광처럼 번뜩였다.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그림자 속에 숨은 자를 끌어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
그것은 바로 '폭로'였다.
그 깨달음은 잊고 있던 오래된 기억의 서랍을 열어젖히는 열쇠가 되었다.
아득한 에덴 보육원 뒷산. 배고픔에 지쳐 토끼굴을 파고들던 시절.
굴 깊숙이 숨어버린 토끼를 잡기 위해
우리는 굴 입구에 마른풀을 태워 연기를 피웠다.
자욱한 연기가 굴 속을 채우면,
토끼는 숨통이 막혀 결국 밖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연기. 그래, 연기.
태경이를 은신처에서 끌어내기 위한 강력한 연기가 필요했다.
그를 숨 막히게 할, 세상 밖으로 뛰쳐나오게 할 치명적인 연기.
그의 가장 깊은 곳, 가장 취약한 심장부를 건드릴 수 있는 미끼.
그것은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차가운 확신에 사로잡혔다.
나는 곰곰이 보육원에서의 그와의 추억들을 곱씹었다.
그의 표정, 그의 몸짓, 그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들.
기억의 파편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랬다.
그는 유독 그의 어머니가 물려주었다는 옥가락지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그 옥가락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유리 조각으로 기철이의 손과 발을 내리찍은 광기.
노도술을 칼로 찌른 잔인함.
그리고 불 구덩이 속으로 뛰어든 옥가락지에 대한 집착.
그 모든 광기와 잔인함, 그리고 집착의 심장부에는,
옥가락지가 상징하는 빼앗긴 가문의 유산을 되찾고
할아버지의 원한을 풀려는 맹목적인 집착이 도사리고 있었다.
옥가락지.
그것은 단순히 그의 어머니의 유품이 아니었다.
옥빛 투명한 빛깔 속에는
신라 고분에서 끌어올려진 유물의 아득한 역사가 담겨 있었다.
야나기 가문의 손에 들어오면서,
그 가문의 긍지와 함께 어두운 그림자가 고스란히 깃든 듯했다.
태경이의 일본인 혈통, 그리고 가문의 역사가
그 투명한 빛깔 속에 선연하게 아로새겨진 듯했다.
그것은 유태경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본인 혈통,
야나기 가문의 긍지를 상징했다.
그리고 바로 그 긍지가, 그 가문의 어두운 진실,
즉 도굴꾼이라는 추악한 정체와 함께 세상에 드러난다면,
그것이야말로 태경이를 숨 막히게 할 치명적인 '연기'가 될 터였다.
그 긍지가 역설적으로 그를 옥죄는 족쇄가 되어,
굴 속에서 그를 끄집어낼 것이 분명했다.
태경이는 그 유물들이 한국의 것이 아닌,
할아버지의 '정당한 유산'이라 굳게 믿고 있을 테니,
이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그의 가장 깊은 역린을 건드려 분노를 폭발시킬 것이 분명했다.
내 안을 짓누르던 무기력은 차가운 안개처럼 걷히고,
그 자리를 단단한 결의가 채웠다.
마치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난 맹수처럼,
내 눈빛은 다시금 날카로운 광채를 띠었다.
나는 마치 손에 강력한 무기라도 쥐게 된 기분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무기력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나는 기꺼이 사냥꾼이 될 참이었다.